집단수용 이력 밟아보니…‘시설폭력’ 아닌 ‘국가폭력’ 명백
- 1962년 전국 23곳 수용시설
- 그 후 수십 년간 이어진 잔혹사
- 피해생존자 수용이력 추적하니
- 전국에 걸쳐 대대적으로 자행
- 부산~서울 장거리 이동도 많아
- 일단 한 번 갇히면 수용은 반복
- 19명 중 14명이 다중시설피해자
- 부랑아 낙인 찍히면 도피처 없어
- 개별 시설 아닌 시스템 조사는
- 국가 폭력에 대한 사죄와 상통
- “지금이라도 인간답게 살고파”
- 피해생존자 절규 귀기울여야
보금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단속을 피해 뒷골목 그늘에 몸을 숨기고, 기차역 대합실 구석을 파고들었다. 고향을 떠나면 지옥의 시설에 붙들릴 일도 없을 거라 여겼다. 언젠가 엄마 아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갈 날이 오길 염원했다. 그렇게 열차며 버스에 올라 멀리 떠났다.
그러나 국가의 ‘분리·수거’는 전국 어디에서나 자행됐다. 행색이 남루한 ‘부랑아’라며 또다시 수용시설로 끌려갔다. 강제로 사회로부터 격리돼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받았다. 매질과 굶주림, 질병, 그리고 죽음이 어린 삶들을 배회했다. 국가의 행위라면 반인륜조차 용인되던 시절, ‘집단수용 디아스포라’에게 벌어진 비극이다. 시설이 아닌 당대 체제가 저지른 범죄, 즉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바로 이들이다.
1962년 기준 전국에 23곳의 부랑인 집단수용시설이 들어섰다. 그 뒤 수십 년간 집단수용 잔혹사가 이어졌다. 피해생존자는 시설을 피해 국내 각지를 떠도는 한편, 시설에서 시설로 강제 전원당하면서 낯선 땅에 내던져졌다. 겪게 되는 일은 전국의 시설 어디에서나 같았다. ‘나쁜 시설’ 몇 곳의 악행을 탓할 게 아니었다. 악행의 주체는 국가였고, 시설은 이 같은 행위가 실행된 개별 공간일 뿐이었다. 집단수용 디아스포라들은 국제신문에 어린 시절 겪은 지옥을 털어놓으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이처럼 호소했다.
그러니 당대의 피해는 특정 시설 단위로 국한될 수 없다. 수백 수천의 아동이 시설에서 생을 끝내야 했다. 죽은 아이의 시신은 야산 구덩이나 쓰레기매립장 늪지대 ‘똥통’ 아래에 묻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태껏 집단수용의 체계 그 자체를 추적하지 못했다. 폭력의 거대한 흐름을 쫓는 대신 당장 드러난 일부만을 조명하며 ‘파편적 진상규명’과 ‘부분적 사과’를 거듭해 왔다.
‘집단수용 디아스포라 이력도’에는 피해생존자 19명의 수용 경험이 담겼다. 이들 중 3명은 유족의 기억을 토대로 이력을 구성했다. 대상자는 부산지역에서 집단수용된 경험이 있느냐를 기준으로 선정했다. 즉 대상자는 모두 부산지역의 대표적 집단수용시설이었던 영화숙·재생원과 형제원(형제육아원, 형제복지원), 부랑인 개척단인 금성개척단의 피해생존자와 그 유족이다. 부산 소년의집을 제외한 시설들은 당사자가 피해당한 사실을 분명히 증언한 곳만을 표시했다. 또 소년원·고아원 등 학대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당사자가 설명한 곳 역시 배제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작성됐음에도 이력도상 ‘수용 행방’은 전국에 걸쳐 뻗어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특히 부산과 서울을 핵심지로 단속과 수용이 일어났다. 대상자들이 증언한 시설은 모두 14곳인데, 부산 소재 시설이 5곳이며 서울 소재는 3곳이다. 이외 지역에서의 수용 또한 ‘경부선’을 따라 그려지는 모습이 나타나며 서울~부산 직접 이동 역시 적지 않다. 당대수용 아동은 연고에 따라 해당지역 시설로 옮겨지곤 했다. 그러나 실제 연고 여부와 무관하게 시설 편의대로 전원되는 사례가 잦았다. 일례로 피해생존자 백성훈(가명·61) 씨는 고향이 경기도 연천인데도 아무 이유 없이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부산 영화숙으로 옮겨졌다.
대상자 19명 중 하나의 시설에서만 수용됐던 이는 5명에 그친다. 이 중 이상복(1935년~1979년) 씨는 첫 시설인 형제복지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나머지 14명은 최소 2곳 이상을 거친 ‘다중시설피해자’다. 서울 출생 홍성정(57) 씨는 서울과 경기, 부산의 시설 6곳에 수용당했다. 한 시설에 여러 번 갇힌 점을 감안하면 실제 수용 횟수는 더 많다. 경남 양산이 고향인 손석주(61) 씨는 부산 대구 대전에서 단속돼 참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북 포항 출신인 ‘태권도’(59) 씨는 부산과 서울은 물론 전남 목포와 경기에서도 시설에 갇혀 치욕을 당했다.
부랑아로 낙인찍힌 이들에게 도피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김성주(70) 씨는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혼혈아인 그는 부산 영화숙에서 죽도록 맞으며 살았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탈주해 포항의 보육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해외 입양을 권유받은 김 씨는 두말없이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이후 그는 미 공군으로 일하던 새아버지를 따라 태평양을 건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20대를 보낸 김 씨는 아버지처럼 군인이 돼 존경받는 인생을 살았다. 한국에 남았더라면 기대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서울시립갱생원, 대전 성지원 등 비교적 최근에야 피해사실이 공인된 시설도 눈에 띈다. 이들 시설은 성인 부랑인 시설로, 수용인의 취업 등 자활을 목적으로 운영됐다. 어린 시절 찍힌 낙인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삶을 위협했음을 보여준다. 성지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불거진 1987년 당시 ‘제2의 형제복지원’으로 그 실태가 대두된 바 있다. 하루 12시간씩 강제로 노동시켰으며, 이로 인해 1984년부터 1987년까지 12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이들 시설은 오는 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발표될 예정이다.
집단수용 ‘시설’이 아닌 ‘체계’를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2013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해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 진상과 규모를 파악할 무렵부터다.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여준민(여·50) 씨는 누구보다 이 지점의 중요성을 통감한다. 그는 10년 이상 형제복지원 사건을 앞장서서 살피며 수많은 피해생존자를 만났다.
여 씨는 “피해 조사를 해보니, 형제복지원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1986년에만 하더라도 전국에 36개 수용소가 각 지역에 분포됐는데, 피해자들이 형제복지원에만 계셨던 게 아니라 인천의 삼영원, 대전의 성지원, 대구 희망원, 서울의 갱생원 등 전국에 있는 시설들이라 하는 데는 다 한 번씩 거쳐 시설로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며 “피해자들이 하시는 말씀이 ‘비단 형제복지원에서만 폭력적으로 납치되다시피 수용돼 통제되면서 강제노역이나 폭력을 당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경험했던 전국의 시설이 다 그렇게 운영됐다’고 말씀하셨다”고 기억했다.
피해자들의 말대로, 시설은 정말 ‘다 그렇게’ 운영됐다. 그는 “수용소의 운영 구조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운영 체제 관리 방식이 폭력과 위계에 의한 통제이며, 이 통제는 해당 시설의 직원을 대신해 수용인이 수용인을 통제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시설 책임자들이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았으니 의식주를 해결해 줘야 하는데 이를 위한 의사 같은 전문가를 고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며 “또 시설은 성별 구분도 없이 0세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했고, 그중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여기에는 ‘자립 갱생’이란 명분이 붙었다. 이들이 외부의 업체에 일해서 번 돈은 고스란히 착복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2014년 형제복지원 사건 규명을 위해 발의한 특별법 제정안을 철회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만을 대상으로 해선 다른 시설에 수용된 수많은 피해자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집단수용 피해 조사는 여전히 저 시절에 머물러 있다. 체계에 관한 조사는 시도되지 않으며, 그마저 당사자가 직접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진상규명 작업에 들어가지 않는다. 여 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게 형제복지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증언이나 기록을 보고 그곳의 처참함이 이야기되고 부각되는 것이지, 비슷한 유형의 통제 방식을 다른 시설에서도 경험했다는 피해자가 상당수다”며 “가난했던, 가출했던 내 잘못이라는 식으로 자책하는 피해자 역시 많다. 이런 죄책감이나 자책감을 덜어주려면 국가가 분명히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단수용 체계를 조사하라는 주문은 곧 당대의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빠짐없는 사죄를 전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사죄에 뒤따르는 치유 행위 또한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피해생존자가 사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죄가 그들을 뒤늦게나마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이 국가에 바라는 바를 알아야 한다.
손 씨는 ‘지금이라도 인간답게 살 기회를 달라’고 목소리 냈다. 그는 “지금부터 하루를 살든 몇 년을 살든, 그 사는 기간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인간답게 이 세상을 살다가 갈 수 있도록 정부가 해주길 바랄 뿐이다. 지금 와서 우리 어린 시절에 그 해를 끼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거 잘 안다.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살았지만, 말년에는 그래도 우리가 어릴 때 당한 일들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알아주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정부에서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전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일 계기를 마련해 달라는 주문도 나왔다. 부산 영화숙 피해자인 최영수(64) 씨는 “두들겨 맞는 게 지금도 정신 속에 남았다 보니 지금도 괜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친구가 많이 있다. 그나마 친구들이 앞에 있으면 최고 편하다. 내가(시설에서) 벌을 받고 그렇게 두드려 맞아도 내 친구가 옆에 있으면, 머리가 피가 나더라도 얼굴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게 내 친구였다. 서로 의지하며 얼굴 보고 옛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억울하게 생을 끝낸 이들 또한 지금처럼 남겨둬선 안 된다. 박남신(67) 씨는 “먼저 세상을 억울하게 떠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보다도 위령제라도 한번 지내주길 바란다.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의 어떤 가치도 없이 한 마리의 새나 한 마리의 동물처럼 그냥 죽은 영혼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름 모를 영혼들을 위해 무언가 해줘야 하지 않는지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들 일의 출발점은 물론 빠짐 없는 진상규명이다. 피해자들은 진화위 같은 임시기구를 통해 간헐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박경보(60) 씨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중단 없이 조사해야 한다. 부스러기 하나 주고(시설 일부만 조사) 우는 몇 사람만 달랠 것이 아니다. (조사가 끝나고 난) 뒤에 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홍 씨 또한 “이 사람이 아프다 그러면 원인을 찾아줘야 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위해 직권조사를 직접 지시해야 한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평생 기다리게 하는 건 야비하다. 어린 애들 데려다가 다 죽여놓고 나서 발뺌하는 건 안 된다”고 역설했다.
◇ 집단수용 디아스포라들이 국가에게 전하는 한마디
▶박경보 : 상설기구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부스러기 하나 주고 우는 몇 사람만 달랠 것이 아니라, 뒤에 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죠.
▶홍성정 : 국가가 먼저 이 사람이 아프다 그러면 원인을 찾아주고, 고통을 겪는 사람의 직권조사를 직접 지시해야 됩니다. 사람 죽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건 야비한 거죠. 어린 애들 데려다가 다 죽여놓고 나서 발뺌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이동희(이상복 씨 아들) : 많은 사람이 그동안 사회적으로 숨어서 지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아픔을 많이 알리고, 피해를 겪은 사람들을 찾아내 제대로 그때의 아픔을 보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석주 : 지금부터 하루를 살든 몇 년을 살든, 그 사는 기간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인간답게 이 세상을 살다가 갈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 와서 우리의 어린 시절에 그 해를 끼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살았지만, 말년에는 그래도 우리가 어릴 때 당한 일들을 대한민국 정부가 알아주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태권도’ : 표면적으로 드러난 피해자들 말고도 아직까지도 시설에서 지냈던 그 악몽이나 수치심 때문에 아직 웅크리고 사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그런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게 국가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자라온 환경 차이 때문에 저희들이 그렇게 된 거지,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요. 국가의 책임이 굉장히 큽니다. 국가가 좀 더 관심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최영수 : 두드려 맞던 기억이 지금도 정신 속에 남았다 보니 지금도 괜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친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나마 친구들이 앞에 있으면 최고로 편합니다. 내가 벌을 받고 그렇게 두드려 맞아도 내 친구가 옆에 있으면, 머리가 피가 나더라도 얼굴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게 내 친구였죠. 서로 의지하며 얼굴 보고 옛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박남신 : 먼저 세상을 억울하게 떠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보다도 위령제라도 한번 지내주길 바래요.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의 어떤 가치도 없이 한 마리의 새나 한 마리의 동물처럼 그냥 죽은 영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름 모를 영혼들을 위해 무언가 해줘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글= 영상=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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