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주의 운동가’ 이소선의 41년…‘낙관의 힘’ 남겼다
1970년 분신한 큰아들 전태일과 약속
이소선 어머니, 41년 노동·민주화 운동
모든 노동자와 약자의 어머니로 살아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우리 스승이지”
70~80년대 이소선 집 앞에 경찰 초소
전담 형사·안기부 담당 일상적 감시
연행·구류·수배·감옥살이 밥 먹듯이
투옥 땐 평화시장 노동자들 매일 집회
권력자에겐 당당하고, 약자에겐 눈물
비전향 장기수·조작간첩 가족도 껴안아
‘민주화 유공자법’ 못 이루고 떠났지만
“될 일은 언제건 된다” 그 격려 ‘쟁쟁’
13년 전 오늘(2011년 9월3일), 제주도 강정마을에 행사가 있어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어.” 오늘은 이소선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3년 되는 날이다. 내 인생의 스승은 이소선이다. 이소선을 보면서 운동을 배웠다.
이소선 어머니는 나를 소개할 때 ‘동거인’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내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발을 들이고, 사무국장을 한 5년 동안 이소선과 거의 붙어살다시피 했다. 1989년 하반기에서 약 1년 동안 한울삶(유가협 회원들의 사무실 겸 주거시설)을 거처로 삼아서 살았다. 어머니도 쌍문동에 집이 있었지만, 한울삶을 지켰다. 오래도록 집에 가시지 않을 때면, 식구들이 집에서 옷가지들을 싸 갖고 한울삶으로 왔다.
1989년 12월 어느 날, 그날 어머니는 방에서 혼자 주무시고 계셨고, 나는 늦은 밤, 사무실로 쓰던 문간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래군아! 래군아!”
어머니가 고함을 치듯이 나를 불러서 다급하게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머니가 진땀을 흘리면서 앉아계셨다. 물을 한잔 떠다 드리니 가슴을 진정한 뒤에 말씀을 하시는데, 벽에 걸린 영정사진 주인공들이 꿈속에서 어머니에게 말하더란 거다. 깨진 얼굴, 불탄 얼굴, 퉁퉁 부어오른 얼굴, 눈도 없는 얼굴, 그 얼굴들이 어머니에게 얼굴을 디밀면서 말하더란다.
“어머니, 우리를 지켜 주세요.” 그래서 답을 했다고 하셨다.
“내가 너의 한을 풀어줄게, 이 엄마가 싸워서 너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줄게.”
1970년 큰아들 전태일이 분신으로 죽어갈 때 전태일은 이소선에게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죽어가는 아들과 약속을 했다. 태일이가 이루려던 세상이 자신의 목표가 되었다. 약속대로 몸이 부서져라 싸웠다. 그때의 약속을 지키며 살았던 41년이었다. 그가 큰아들 전태일을 잃은 건 그의 나의 만 41세였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로 41년을 살았고, 나머지 41년은 전태일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더 나아가 모든 이의 어머니로 살았다. 나는 감히 말한다. 이소선의 분투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전태일도 없었을 거라고.
이소선이 없었으면 전태일도 없었다
“여러분이 없다면 어떻게 전태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전태일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찾고 모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사람 모두가 전태일입니다!”
이게 이소선의 진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태일의 어머니를 넘어서 모두의 어머니로 추앙받게 되었다. 유가협 시절에 이소선 어머니를 모시고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를 만나러 동교동 자택으로 간 적이 있었다. 김대중 총재가 이소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모두의 어머니십니다. 나도 어머니라고 말하잖아요.”
그의 말처럼 이소선은 모두의 어머니였다. 오죽하면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에서도 “북에서는 김일성 아버지라고 하고, 남에서는 이소선 어머니라고 하는데, 당신이 빨갱이 원조”라면서 다그쳤다고 하지 않는가.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이소선의 집 앞에 경찰 초소를 세워 어머니를 감시했다. 전담 형사가 있었고, 안기부 담당이 있었다. 이소선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넘어서 투쟁이 있는 노동현장은 자기 일인 양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민주화운동으로 활동이 넓어졌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소선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경이롭다. 전태일 열사 사망 뒤에 중앙정보부와 노동부 등 관계자들이 돈을 한보따리 쌓아놓고, 어머니를 회유하더란다. 그때 이소선은 그 돈을 흩뿌리면서 회유를 뿌리쳤고, 그 결과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전태일 분신 2주 만인 1970년 11월27일에 결성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 했다. 헌옷가지를 수거해다가 수선해서 팔아서 생긴 돈으로 노동조합 간부들 국수를 해 먹였다고 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빼앗기고, 노동교실도 여러번 폐쇄되었다.
1975년 12월16일 저녁 8시, 평화시장에 불이 꺼졌다. 야근에 특근을 밥 먹듯이 해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경비들이 퇴근하라고 독촉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노동자들은 그날을 벅차게 기억한다. 그 모든 일을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그러다가 연행되고, 구류 살고, 수배도 당하고, 감옥에도 갔다. 감옥에 갔을 때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야근을 마치고 구치소로 달려와 어머니를 부르면서 매일 집회를 했다.
타고난 이야기꾼
이소선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나와 유가협 회원들은 어머니의 1970년대의 투쟁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서 어머니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 얘기를 들으면서 배웠어야. 이소선 어머니가 우리 스승이지.”
배은심 어머니가 했던 말이 정말이었다. 말은 어렵지 않았고, 구수했다. 울고 웃으면서 얘기를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2009년 용산참사로 수배 중일 때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유가협 회장 할 때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만날 래군이한테 물어보며 했지.”
그런데 이 말은 어폐가 있었다. 이소선은 머리 회전이 무척 빨랐다. 상황을 죽 꿰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론을 짓고는 했다. 이소선은 공을 다른 이에게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85년 김문수(지금 고용노동부장관) 등의 주도로 창립된 서노련(서울노동연합)은 경제주의적인 노동조합운동을 부정하고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때 이소선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속에서 노동조합이 있어야지, 몇몇 운동가끼리 모여 어떻게 노동운동을 하냐.(중략) 노동자 속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튼튼히 꾸려, 그 힘으로 노동운동도 하고 정치운동도 해야 옳지 않냐.”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운동의 경력을 발판 삼아서 출세의 길로 간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기에 마지막 거처도 창신동 월세방이었다.
“인간 차별이라고 하는 건 대가리 터지도록 싸워. 왜냐면 인간은 날 때부터 인권은 똑같이 갖고 타고났어. 배우고 돈 있다고 인권을 제 맘대로 휘두르고 그러면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은 사람 아닌가. 타고날 때 똑같이 타고났어. 어따 대고 무시하고 그러냐고.”
“될 일은 언제건 되더라고.”
그는 어디에서건 싸울 때면 가장 높은 사람들을 찾아서 상대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장군이라고 해서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식 잃은 에미가 겁날 게 뭐냐는 그런 당당한 태도, 그러면서도 노동자나 힘든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눈물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울삶에는 이소선을 만나러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 사람들도 꺼렸던 비전향 장기수들, 조작 간첩의 가족들도 만나서 덥석 손을 잡고 “고생했다”며 안아주고, 손잡아 끌고 밥 먹고 가라고 했다. 나이가 적다고, 여자라고,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속바지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아둔 돈을 손에 꼭 쥐여주면서 힘내라고 등을 두들겨주고는 했다.
그런 그는 무한 낙천주의자였다. “박정희 때 이런 민주의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냐.” 그게 이소선이었다. 그는 유난히 단결을 강조했다. 한명씩 잡혀가지 말고 모두 잡혀가자, 그러면 권력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단결해야 한다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었던 일은 ‘민주유공자법 제정’이었다. 투쟁 중에 자결하거나 국가폭력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면 “목숨마저 버리고 민주화하려고 했던 사람을 나라가 기억해 줘야 하지 않냐”는 이소선의 바람은 아직 미완이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될 일은 언제건 되더라고.”
이소선 어머니의 이 말을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평등주의자, 이소선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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