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진실 외면…제주4·3과 간토대지진 닮아”

허호준 기자 2024. 9. 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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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제주서 간토대지진 전시회 여는 김성환 신부 박민희 전시기획자
‘그림 한 점의 소명’을 기획 전시한 박민희 기획자와 제주 전시를 추진한 김성환 신부. 허호준 기자

“제주4·3과 관동(간토)대지진이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가해자가 있고, 이를 오랜 기간 감춰서 진실을 외면했지요. 누군가가 3만여명이 희생된 제주4·3은 3만개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간토(관동)대지진은 6천여명의 조선인이 억울하게 희생됐으니 6천개의 사건이지요. 그런데 한국 정부는 외면하고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억울하잖아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고 일본 정부가 사과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31일 제주시 항구의 관문 제주항 부근 산지천의 한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산지천 갤러리에서 만난 김성환 신부는 제주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간토대지진의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8월1일부터 10월6일까지 열리고 있는 ‘그림 한 점의 소명' 전시회는 강정마을에 있는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와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가 공동 주최했다.

10월6일까지 산지천갤러리에서 고 강덕상 선생이 수집한 화첩과
정용성·이지유·이순려 작품 전시


“역사·예술 융복합할 때, 효과 더 커”

1일은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지 10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간토지역 남부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특히 도쿄와 요코하마는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3일 동안 불바다가 됐다.

이 지진으로 10만여명이 숨지고 4만여명이 행방불명됐으며, 340만여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간토 지역에는 대참사 속에서 “조선인이 불을 지른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인들의 증오와 공포는 조선인을 향했고, 이는 조선인 학살로 이어졌다.

자경단의 선동과 일본인들의 동조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의 희생자는 6천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00년이 넘도록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관심이 없다. 김 신부는 “분단 상황에서 이러한 대재난적 상황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더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기록화. ‘그 밤의 고후쿠바시 부근’. 허호준 기자

지난해 제주시내 성당에서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1983)을 만든 오충공 감독을 초청해 영화 상영회와 간담회를 가진 바 있는 김 신부가 올해 101주기를 맞아 박민희 전시기획자를 끌어들이면서 이번 전시회가 성사됐다.

이 전시회는 그림이 역사를 만나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주한 역사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박 기획자는 이번 전시에 당시의 화첩과 정용성·이지유·이순려 작가의 그림 작품을 함께 전시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전시를 준비하면서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으로 계신 이규수 교수를 만나 고 강덕상(1932∼2021) 선생이 평생 수집한 자료를 접하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 관동대지진 관련 화첩이 눈에 띄었고, 그림을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근대 역사와 미술의 만남이라는 큰 틀을 정해 기획하게 됐어요.”

‘그림 한 점의 소명’을 기획 전시한 박민희 기획자와 제주 전시를 추진한 김성환 신부. 허호준 기자

박 기획자는 “역사와 예술은 전혀 다른 분야인 듯하지만 융복합할 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학술 언어로는 전달되지 않는 역사 현장의 분위기와 감정들이 예술 언어로 표현될 때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기획자는 2015년 열린 4·3미술제 때 아키비스트(기록연구사)로 활동하면서 4·3과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20년엔 강정마을 해군기지 투쟁을 그린 작가 고길천의 ‘붉은 구럼비’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101년 전 6천 조선인 학살당했지만 한국 정부 외면, 일본 정부는 모르쇠
“진상 밝힐 때까지 우리가 기억해야”


이번 전시회의 1부 ‘증언하는 그림’은 강덕상자료센터가 소장한, 관동대지진을 기록한 화첩 3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꾸몄고, 특히 조선인 학살을 알리는 내용을 담았다. 1926년에 나온 화첩 ‘다이쇼진재화집 도쿄’에 나온 그림들은 에이(A)4 용지 크기로 작지만 색감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대참사 속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이들, 전쟁 이재민처럼 보따리를 이거나 수레에 가득 짐을 싣고 이동하는 시민들, 도쿄 고후쿠바시 근처의 건물이 벌겋게 불타고 시민과 말이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이 100년 전 대참사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시된 요코하마 학생들의 관동대지진 체험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밤이 되자 여기저기에서 조선인 소동이 일어나 나는 죽창을 들고 주위를 돌아다녔다. 저쪽에서는 조선인을 죽이고 ‘만세! 만세!’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자 또 건너편에서 조선인이 있다고 말하자 ‘땅!’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열심히 주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 조선인이 있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네!’하고 소리치며 곧바로 조선인을 해치웠다.” (고토부키 소학교 5학년생)

‘그림 한 점의 소명’에 전시한 작품들. 허호준 기자

2부는 ‘기억하는 그림’을 주제로 정용성·이지유·이순려 작가의 작품 23점을 전시했다. 정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4·3과 관련있다. 작품 ‘멜젓처럼’은 2007∼2008년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 내용을 담고 있지만,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을 보여준다. 재일 제주인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지유 작가의 그림 속에는 일제 강점기 제주인들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던 군대환(기미가요마루)이 ‘강철 무지개’라는 이름으로 전시됐다. 재일동포 3세인 이순려 작가는 검은 비닐봉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관동대지진은 101년 전 10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난입니다. 하지만 대재난 속에서 왜 조선인들이 학살당해야 했을까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데 제주사람들은 왜 학살당해야 했을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박 기획자의 말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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