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칼럼] MZ 의사들의 불안·불신부터 해결하라
불안과 불신. 요즘 한국 청년층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과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불안은 고령화, 저출생, 저성장 시대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불신은 선배 세대, 정부, 사회에 대한 불신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의료도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이 문제가 있다. MZ 의사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선배 세대·정부·사회에 대한 불신이 지금의 의료 대란이 발생한 한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현 의료 위기의 시작은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로 시작된 지난 2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의 사직과 의대생들의 휴학이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들의 불안과 불신이라는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아니, 지금까지도 이해할 생각은 하지 않으며 '착각'과 '오판'을 거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턴과 레지던트, 지들이 갈 데가 있겠어? 전문의 안 따면 뭐 먹고 살건데?" 사실 같은 의사인 의대 교수들 중에도 "왜 안 돌아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의 생각은 지금도 확고해 보인다. 응급의학과의 치프(레지던트 마지막 연차)였다가 지금은 사직하고 스타트업을 시작한 한 청년 의사는 SNS에 교수들에게 이렇게 썼다. "저희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년 3월에 막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하셨다면 기대를 버리십시오. "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주 100~120시간(36시간 연속근무)을 최저시급도 못받고(월급 350만~400만원) 혹사당하면서 저수가 정책 속에서 대학병원 경영을 떠받쳐왔는데,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정책으로 전문의 자격증의 가치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 것이 청년 의사들의 생각이다. 미국이나 일본으로 나가거나 기업체, 로스쿨로, 아니면 일반의로 하루 빨리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는 거다.
우선 청년 의사들은 한국 의료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다. 모든 청년들이 국민연금 등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더해, 청년 의사들은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도 지속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도 매우 크다. 앞으로 정부와 어떤 합의를 한다고 해도 이를 지킬지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정부는 2020년 의사협회와 의정합의문에 서명하고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2014년에도 "의사보조인력(PA)의 합법화에 대하여 대한의사협회 및 대한전공의협회와 사전 합의 없이 이를 재추진하지 않기로 한다"고 약속했지만 역시 뒤집었다고 주장한다.
기성세대인 의대 교수들과 의사협회도 불신하고 있다. 교수들은 인턴·레지던트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정작 필요한 의료지식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불신이 팽배하다. 인터넷에서 거칠게 의사 욕을 하는 댓글들을 보며 상처받는 과정에서 환자들에 대한 불신도 생기고 있다. "내가 잠도 못 자고 살려낸 환자들이 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토로하는 청년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빨간약'을 먹었다고 표현한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은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필수과 전문의가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는 생각들인 것 같다.
최근 사직한 응급의학과 치프는 이렇게 썼다. "꽃이 흐드러지던 봄날에 병원을 나와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의사이기 전에 엄마와 아빠의 꿈과 사랑으로 자라난 아들과 딸임을, 병원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수련만이 의사의 유일한 길이 아님을,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업(醫業)만이 아님을, 행복도 불행도 슬픔도 기쁨도 병원 바깥에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MZ 전공의 의사들의 주 100~120시간 근무 노동력 혹사를 통해 돌아가던 '싸고 좋은 K의료'는 불가능해졌다는 현실을 이제 인정해야 할 듯 하다. 저수가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 그냥 놔두면 사망할 중증 환자를 살리려는 시도조차 결과가 나쁘면 민형사 소송에 시달리는 현실도 바꿔야 한다.
기성세대가, 정부가 MZ 의사들의 생각과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불안과 불신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 이것이 한국 의료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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