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돋보기] 석비가 남아 전해지기까지

2024. 9. 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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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사

궁궐, 왕릉, 사찰, 서원 등에 가보면 한 번쯤은 입구에 세워진 비석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글자를 새긴 비석인데 이것을 '석비'라고 한다. 눈에 띄지 않아서 종종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글자가 새겨진 돌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석비는 당시 인물의 일대기나 역사적 사건을 알려주거나, 흔적만 남은 역사적인 장소에 그대로 세워져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일종의 안내문과 같다. 특히 문헌에서는 볼 수 없던 기록이 석비에서 발견되기도 해 역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1차 사료가 되기도 한다. 고려시대 고승이 기거했던 사찰 중에는 당시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입구에는 석비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 자리한 석비를 보고 있노라면 당시 사찰과 그곳을 지켜온 고승들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 같다.

석비가 세워지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공력과 지키고자 하는 노력, 마음이 담겨 있다. 석비는 글자를 새기기에 가장 적합한 돌을 고르고, 당시의 최고 문장가와 서예가가 비문을 짓고 쓰고 석각(石刻) 장인이 새겨 완성된다. 석비를 잘 보존하기 위해 비각을 건립하는 공사의 감독관도 따로 두기도 한다.

태종 헌릉 신도비는 1424년에 조선 제3대 국왕인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자 4대 국왕인 세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특히 비석은 강화도 마니산 서쪽 바닷가에서 나는 고급 석재인 청란석(靑蘭石)으로 만들었는데, 돌은 수로를 이용해 강화도에서 한양까지 운반하기까지 했다. 세종대왕은 특히 석비의 건립 과정을 몸소 챙겼는데 비석 새기는 작업을 친히 살피고 참여한 공인들에게 음식을 하사했고, 30병의 술을 내리기도 했다. 비문을 짓고 쓴 관리들과 비석 조성 감독자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기도 했다. 조선의 선대 왕이자 아버지인 태종의 석비를 건립하는 일이었으니 예를 갖추고 지극정성을 다하는 데 어찌 소홀함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고려시대 때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8대 왕 현종은 천안에 홍경사를 창건하고 그 내력을 석비에 새겼는데 바로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다. 과거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나 작은 여관 하나 없고, 갈대가 우거지고 도적들만 많아 여행자들의 어려움이 있었다.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은 여행자들이 편히 묵을 곳을 짓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했다. 아들인 현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고려시대 사찰은 여행자들에게 숙박과 휴식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이 석비는 당시 왕의 명을 받아 해동공자로 잘 알려진 고려 문신 '최충'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를 쓴 이는 당시 이름난 서예가 '백현례'다. 여기에 비석의 몸체를 받치는 귀부는 생동감 있게 조각했다.

많은 사람들을 아껴 돕고자 했던 국왕의 뜻을 더 많은 이들이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석비로 탄생했다. 이 석비에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서예가의 글, 조각가의 기예까지 더해졌으니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고 그 뜻이 전해졌을 것이다.

여수 타루비(墮淚碑)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지 6년 후 이순신 휘하의 군사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석비다. 타루비는 서진시대 중국 양양 사람들이 태수 양호의 덕을 생각하며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석비에는 아픈 사연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1942년 여수경찰서장을 지낸 일본인이 비각을 헐고 타루비를 반출해 서울로 운반해 땅에 파묻었다. 광복 후 여수와 해남 주민들이 비석의 행방을 수소문해 경복궁 뜰에서 발견, 끝끝내 여수로 다시 봉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고 그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제자리로 다시 올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석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 서예가, 장인 들의 공력과 뜻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한데 모여 탄생시킨 하나의 작품이며,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우리가 볼 수 있고 그 뜻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이명옥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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