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에 속 타는 엄마들 “디지털시대 달라진 성평등 교육 절실”
“엄마, A학교도 피해 리스트에 있대요.”
백운희씨(43)는 지난주 중학교 2학년 딸이 툭 던진 말에 숨이 턱 막혔다고 했다.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태’의 피해 학교 명단이 엑스(구 트위터)를 중심으로 돌 때부터 마음은 이미 뒤숭숭했다. 딸이 A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안도감은 잠시였다. 딸의 학교가 계속 피해 학교 명단에 없길 바라는 불안함, 이게 모든 아이들의 일이라는 미안함, 남의 사진을 도용한 이들이 어떻게 악용했는지까지는 아이가 몰랐으면 하는 간절함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딸이 말을 이어갔다. 주변 친구들이 인스타그램 비계(비공개 계정)에 올린 사진까지 내리고 있다는 얘기, 사진을 내리던 도중 계정에서 ‘로그아웃’된 친구가 해킹당했을까 봐 불안해 한다는 얘기였다. 백씨는 “불안해하지마. 엄마도 같이 알아볼게”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정확히 알기 어려운 ‘뒤죽박죽 한 불안감’이 백씨를 엄습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느낄 바로 그 감정이었다.
박민아씨(38)의 11세 딸, 9세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아직 ‘공포’가 퍼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박씨는 “두 성별의 아이를 모두 키우는 입장에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는 김신애씨(42)도 공감했다. 김씨는 “아직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서 “아이들도 이 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쿨미투 등 굵직한 학교 현안에 목소리를 내온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들은 2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사옥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고민을 나눴다. 지인 사진을 악용해 만든 ‘딥페이크 성착취물’ 범죄가 공론화된 지 약 일주일,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이들은 “이대론 미래세대의 상호 신뢰가 무너질 수 있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며 “장기적인 성교육·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지금부터라도 구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주 학부모들은 학교 공지 알림 서비스인 ‘e알리미’로 딥페이크 관련 공문을 받았다. 의심 게시물을 112·117에 신고하거나 학교전담경찰관(SPO)과 상담하라는 내용이었다. 학부모들의 불안을 달래기 역부족이었다.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표현도 걸렸다. 백씨는 “‘씻을 수 없는 상처’는 피해자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냐”며 “오히려 낙인이자 2차 가해로 느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아들을 키우는 김정덕씨(45)는 “친구로부터 피해를 본 아동·청소년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가해를 한 학생에게는 이것이 왜 잘못이며, 앞으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도록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가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그런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없다는 것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절감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5년 성교육 표준안이 나온 뒤로 10년 가까이 성평등 교육이 도외시 됐고, 요즘 성교육 도서가 학교 도서관마다 폐기되고 있다”며 “나와 다른 사람의 경계를 구분하는 법, 관계를 건강하게 맺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점점 더 쉽고 빠르게 성착취물에 노출되고 있다”고 했다.
활동가들은 이번 사태가 ‘일부의 일탈’로 치부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발언, 여성가족부 폐지 추진, 성평등 관련 예산 삭감 등이 모두 텔레그램에서 퍼진 범죄의 토양이 됐다고 봤다. 이들은 “딥페이크 합성 범죄가 기승을 부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것은 결국 어른들”이라고 말했다.
백씨는 정부의 ‘엄중 대응’ 약속이 빈말로 끝나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백씨는 딸이 이번 주 다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접속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딸은 정부의 적극적인 수사 및 모니터링 강화 약속을 접하고 “가해자들이 위축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씨는 “아직 딸의 마음속에 사회에 대한 신뢰가 남아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신뢰를 저버리고 말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수사당국과 교육당국이 정확하고 발 빠르게 대처해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어른들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공교육이 진화한 디지털 환경을 반영한 성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백씨는 “성평등 교육과 디지털 리터러시를 함께 가르칠 수 있는 인력을 어떻게 양성하고 배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라며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온 ‘디지털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지를 지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질 것이란 위기감이 든다”고 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는 피해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피해 지원 상담은 365일 운영하는 전화(☎ 02-735-8994)나 온라인게시판(d4u.stop.or.kr)을 통해 신청할 수 있습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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