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세상읽기]
이철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의대 입학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 간 갈등이 길어지면서 의료 공백 사태는 악화일로에 있다. 이제는 수도권에서도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나타나는 등 응급의료의 붕괴 조짐마저 보인다. 사태 해결을 위해 2026년 의대 증원을 유예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대통령실과 의사단체 모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들의 강경한 대치 속에 환자들의 고통과 국민의 불안은 커져만 가고 있다.
지난 2월 ‘의대 증원, 합리적인 논의와 타협은 불가능한가’(2월19일치 27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필자는 국민이 “누가 더 합리적이고 믿을 만한지, 누가 국민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지를” 따져 이 다툼의 편을 들 것으로 내다보았다. 반년이 지난 지금,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추측한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다. 양쪽 모두 합리적이지도, 진심으로 국민을 걱정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재의 의대 증원 계획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거로 쓰인 한 보고서의 연구 책임자로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인구 변화로 인해 2035년까지 약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해진다는 결론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2019년의 연령별 의료 이용 유지를 포함한 여러 가변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동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의료 이용이 감소한 2020년 데이터를 적용하는 경우, 2035년의 의료 이용은 약 12% 감소한다. 현재와 같은 학력 간 의료 이용 차이가 유지된다면, 인구의 고학력화로 인해 2035년의 의사 인력 부족 규모는 약 3천명에 그칠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간호법의 사례처럼 다른 의료 인력이 의사 업무의 일부를 대신할 수 있다면 의사 부족 규모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2035년 의사 1만명 부족 전망이 유연한 조정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설사 정부의 의사 부족 추계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이를 최단 기간에 채우는 방식의 급격한 증원은 합리적이지 않다. 실제로 정부가 의대 증원의 근거로 삼은 보고서 모두 점진적인 증원을 제안한 바 있다. 첫번째 이유는 급격한 증원이 의학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지원된다고 해도, 단시간에 교수 인력과 교육 인프라를 확충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교육 현장과 의사 인력 시장에 갑작스러운 충격이 발생하고, 그 영향이 현재의 의대생과 전공의에게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당사자들의 불만과 저항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늘리면 가까운 장래에 의사 공급이 어느 정도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의대 교육의 질이나 의료계와의 갈등 문제와 같은 사안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이를 감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의대 증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의사들도 그다지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인구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부족해지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고, 심지어 인구가 감소하므로 의사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과학적·실증적 증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부 결정의 근거로 이용된 보고서에 대한 엄밀하고 체계적인 비판도, 더 합리적인 추계 방법이나 대안적인 의사 인력 부족 전망 결과도 아직 제시된 바 없다. 의사 인력 부족을 덜어줄 수 있는 원격의료나 진료지원(PA) 간호사 제도 등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다. 정부 추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의대 증원은 백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와 국민을 설득하기에 미흡해 보인다.
정부와 의사들의 주장에 공통점도 있다. 지금 당장은 불편을 초래하겠지만, 자신들의 결정과 조치가 장기적·궁극적으로는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 때문인지 정부는 의사들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위업을 달성하고자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고, 의사들은 정부에 굴복한 첫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환자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장기적으로 어느 한쪽이 옳은 것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환자가 끝까지 기다려줄 수 있을까? 경제학자 케인스의 말이 이런 맥락에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run, we are all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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