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프랑스어로 그린 속초, 감미로운 침묵의 대화가…

2024. 9. 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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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엘리자 수아 뒤사팽 <속초에서의 겨울>
속초 청초호와 눈덮인 설악산 모습. /연합뉴스


작가에 대해 모른 채 <속초에서의 겨울>을 읽으면 ‘쓸쓸함이 감도는 속초의 겨울을 평이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필자의 독특한 이력을 알고 나면 속초의 겨울을 섬세한 침묵 속에서 속속들이 건져 올린 예리한 시선에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 결국 추운 겨울 바다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문장 사이사이 스며든 감성들이 뜨겁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 소름이 돋는 소설이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와 서울, 스위스 포랑트뤼를 오가며 자랐다. 스위스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13세 때 어머니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여행했고, 그때 자신 안에 있는 두 문화가 조화로운 결합이 아닌 ‘단 하나의 영토에서 살려고 애쓰는 두 개의 개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뒤사팽은 ‘유럽에서는 아시아인, 아시아에서는 서양인’으로 살며 어디에 있든 자신의 일부는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현실에서 찾아내지 못한 거처를 창조해내는 방법’이었다. 그 거처에서 자신이 ‘일상을 통해 알고 싶었던 만큼 한국을 속속들이 아는 젊은 여인’을 상상했고 그 상상이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이 소설은 뒤사팽이 어릴 때 사용하던 한글을 잊어버려 프랑스어로 썼고,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첫 소설인 <속초에서의 겨울>은 출간 즉시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4세 때인 2016년 로베르트 발저 상, 프랑스 문필가협회 신인상, 레진 드포르주 상을 수상했다. 뒤사팽은 엄마의 나라에서 찾은 소재로 작가로서의 발판을 다진 셈이다.

펜션에 묵는 프랑스 남자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을 젊은 여인’을 상상하며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1인칭 화자는 ‘속초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락없다. 화자는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진 펜션에서 일하는 혼혈 여성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속초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어 손질의 대가인 억척스러운 엄마와 둘이 사는 화자는 일찌감치 떠나버린 프랑스인 아버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그다지 볼거리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속초를 지키는 20대 여성, 애인은 모델이 되기 위해 서울을 오가다 속초를 떠나버린다. 펜션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세탁과 청소를 하며 지내는 일상은 한창 젊은 여성에게 따분하고 힘겹기만 하다.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랑빌에서 태어난 1968년생 프랑스 남자 얀 케랑이 펜션에 투숙한다. 영어로 “며칠 묵어 갈 수 있냐”고 묻는 중년의 프랑스 남자를 보고 화자는 누구를 떠올렸을까. 화자의 관심은 자신도 모르게 별채에 묵는 프랑스 남자에게로 향한다. 요리를 하다가 손을 베어 피 흘리는 화자를 본 프랑스 남자는 단 한 번도 식사하러 오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산책하다 마주친 두 사람, 대화 중에 화자는 한국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고 케랑은 노르망디 출신의 만화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화자는 속초처럼 전쟁을 겪은 노르망디를 <모파상>을 통해 접했을 뿐이었다.

간결한 문체로 그린 감성의 세계

케랑과 함께 DMZ와 설악산을 다녀온 후 화자는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케랑의 방을 청소하며 그가 그리는, 완성되지 못한 여자들을 훔쳐본다. 그림과 씨름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 떠도는 케랑, 아버지도 남자친구도 다 떠나고 없는 속초에 속절없이 머무는 화자, 두 운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책을 읽는 내내 아련함과 속절없음에 젖게 된다. 화자는 곧 떠날 케랑을 위해 눈으로 익힌 위험한 복어 다듬기를 성공적으로 끝낸다. 하지만 케랑은 끝내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떠나버린다. 선 두 개와 발자국, 화첩만 남긴 채.

이근미 작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점철된 겨울 속초, 프랑스를 책으로 익히고 프랑스 말을 배우는 화자의 공허함, 예술을 위해 떠도는 프랑스 중년 남자의 그림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게 어우러진 <속초에서의 겨울>은 느끼는 만큼, 귀 기울이는 만큼 이야기를 들려준다. 끝까지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매듭이 딱 지어지지 않는 가운데 쓸쓸함과 풍성함이 마구 오간다. 간결한 문체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세계를 잘 빚어낸 솜씨도 독서 포인트다.

책을 다 읽으면 인생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나는 어디에 있나, 이런 질문이 마구 떠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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