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弔旗)’ 걸린 경기도…‘봉하마을’ 다녀온 김동연 [오상도의 경기유랑]
김동연 지사, 김해 봉하마을 권양숙 여사 예방
서울∼봉하 대권 광폭행보…친노·친문은 날개?
호남 3차례 방문…DJ·盧·文 경험한 ‘경제전문가’
소통·성과 부족은 과제…도의회 野 “도정 전념”
‘지지율 29.6%’.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2일 공개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2년 만에 다시 20%대 하락이라는 극명한 수치를 드러냈다. 취임 이후 두 번째로 낮다는 설명은 최근 정부가 안팎으로 처한 어려움을 방증하는 듯 보인다.
누군가의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최근 ‘장외 대권 레이스’에 뛰어든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발걸음은 오히려 분주해졌다. 기회소득 등 ‘기회 시리즈’를 내놓고 나름 색깔 있는 정책을 펼쳐온 그는 최근 기회경제까지 거론하며 영역을 확장한 상태다.
“목표를 잡고 길게 가자, 사람 사는 세상의 꿈 더 크게 이어가겠다.”
지난달 3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김 지사는 첫 일정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참배로 잡았다. 이후 방명록에 ‘사람’을 강조하는 글귀를 적었다. 최근 민선 8기 후반기 기조인 ‘사람 중심 경제’와 잇닿아 있다.
김 지사의 봉하행은 노무현재단 초청 특별대담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팎의 이목은 권양숙 여사와의 만찬에 쏠려 있었다. 만찬장에는 노무현재단 이사장인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노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의원을 비롯해 김정호·김현 의원 등이 함께했다. 이른바 과거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으로 불리던 인사들로, 김 지사의 비명(비이재명)계 인사들 규합과 짝지어 바라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만찬에 앞서 이뤄진 권 여사와의 만남은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했다.
권 여사는 김 지사의 정치적 ‘운명’을 거론했고, 김 지사는 ‘상고 출신’, ‘다짐’, ‘족탈불급’(足脫不及·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함)을 언급하며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고 적극적으로 호남에 구애해온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DJ·盧·文 대통령을 잇는 호남·영남·수도권 벨트 구축이 자리 잡은 듯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엿들어보면 이런 속내를 감지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권 여사는 “귀한 시간을 쪼개 봉하마을까지 와주셨다”며 김 지사 내외를 환대했다. 김 지사도 “노 전 대통령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다짐을 위해 뵈러 왔다”고 화답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시절 김 지사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국가전략보고서 ‘비전 2030’이 화제가 됐다.
권 여사는 “참여정부 정책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정책이 좌절된 것이 많은데 그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비전 2030이다. 참여정부에서 기획했던 비전 2030 때문에, 김 지사가 다시 정부에 참여하시고, 정치하게 되셨는데, 정치인의 삶은 운명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이나 김 지사님이나, 모두 의지를 가지고 고생하면서 삶을 개척해 오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김 지사는 ‘족탈불급’이라는 성어를 인용하며 “외람된 말씀이나 대통령님과 저는 상고(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김동연 지사 덕수상고)를 나왔고, 삶의 여정이 비슷해서인지 (노 전 대통령 유고집인) ‘진보의 미래’를 읽으면서 대통령님의 생각이 이해가 됐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대화 직후 경기 포천에서 생산된 한과와 노 전 대통령의 어록이 새겨진 부채를 선물로 교환했다. 이 부채에는 ‘지금 여러분의 생각과 실천이 바로 내일의 역사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요즘 경기도는 사실상 ‘그림자 내각’, ‘예비 내각’을 뜻하는 ‘섀도캐비닛’을 꾸리고 윤석열 정부는 물론 이재명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과도 결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경기도 기후대사), 전해철 전 행정안전부 장관(경기도 도정자문위원장), 강민석 전 청와대 대변인(경기도 대변인) 등 도정 곳곳의 요직에 친노·친문 인사들이 넘쳐난다.
야권은 친문 적자인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의 복권과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등장에 이미 요동치고 있고, 김 지사는 ‘변방’ 경기도에서 기회를 엿보는 모양새다.
최근 행보 역시 두드러진다. 이종찬 광복회장을 만나 경기도립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을 시사하고 도가 단독으로 숨겨진 독립유공자 발굴에 나섰다.
경술국치일인 지난달 29일에는 도청에 조기를 내걸었다. 이어 “오늘은 제2의 경술국치로 기억될 것”이라고 한탄하는 글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윤석열 정부를 비난했다. “일제가 전쟁에서 패망했기에 독립을 얻게 됐다”는 윤 대통령의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 발언을 전하며 “오늘 대통령이 온 국민 앞에서 한 말이다. 제 귀를 의심했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높아지는 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 수위 역시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는 평가다. 김 지사는 이번 봉하마을 방문 기간 노무현재단 초청 특별대담에선 “윤석열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국민의 불만과 분노지수가 점점 올라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대한민국 헌정사에 불행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전인 조선시대로 치면 지방 도백(道伯)이 임금에게 정면으로 하야를 거론한 셈이다.
김 지사는 그러면서 “엊그저께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서 의료대란 현실에 대해 다른 나라 사람처럼 얘기해 놀랍고 분노가 치밀었다. 달나라 대통령인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원으로 돌아온 이달 1일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수수 혐의 수사에 대해 “수사로 보복하면 깡패지 검사냐고 했던 윤 대통령이 답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어록’을 인용,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지사는 “명백히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친노·친문인사들을 잇따라 영입하고 올해에만 세 차례 호남을 공식 방문한 김 지사의 대권 행보는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
당장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김 지사에게 대권은 마지막 선택지일 수 있다. 애초 재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수도권으로 내려온 그에게 인구 1400만의 경기도는 기회의 땅이었다. 경기도를 ‘테스트 베드’ 삼아 평소 꿈꿔온 정책을 실험하고, 결과물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썬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김 지사를 차기 지방선거에서 도지사로 재공천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지난 대선에서 김 지사와 이 대표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건 표면적으로나마 공정한 경쟁이었을 것이다. 이 대표의 낙선으로 김 지사는 어제의 동지였던 이 대표와 내일의 적이 돼 당내 경선을 치르거나, ‘이재명 리스크’에 대응해 당내 예비주자로서 다른 잠룡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매서운 운명을 맞게 됐다.
‘사즉생’(死卽生)의 싸움에 뛰어든 김 지사에게 해결해야할 과제 역시 산적해 보인다. 도의회 ‘불통’이란 이미지를 걷어내고 4년의 짧은 임기 동안 누구나 인정하는 가시적 성과를 거둬야 한다. 도의회 야당인 국민의힘은 벌써 “대권 행보를 멈추고 현안 해결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세 차례의 호남 방문에 맞먹는 삼고초려는 어떠할까. 대권 광폭 행보에 앞선 도정 광폭 행보를 기대해 본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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