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환자단체들 “유일한 해법은 의대 정원 규모 조정”
한국백혈병환우회 등 9개 단체가 소속된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일 “의료 공백 사태의 유일한 해법은 의대 정원의 증원 규모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의사 인력 수급 추계 전문위원회’를 신속히 구성해 2026년 의대 정원을 결정하는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회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의료 개혁 제1차 실행 방안’을 두고 “반년 이상 이어오고 있는 의료 공백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속하게 추진해야 할 내용이 빠져 있다”며 이같은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연합회는 경증·비응급 환자가 상급종합병원(대형 병원)의 응급실을 이용하는 경우 외래 진료비 본인 부담 수준을 90%로 인상하는 방안 등에 대해 “전 국민의 70% 이상이 실손보험에 가입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 가난하거나 실손보험이 없는 환자의 경제적 부담만 가중된다”며 “정부가 실손보험을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런 제도를 추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에도 반대한다고 했다. 개혁안에 고위험 필수 의료 행위는 중상해·사망사고까지 형 면제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에 대해 연합회는 “자동차 사고처럼 입증 책임을 (의료인에게) 전환하도록 규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위헌성이 높은 중상해·사망·중과실 의료 사고까지 특례를 허용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법 제정에 앞서 의료 사고 피해자·유족이 의료인 대상으로 형사 고소를 하지 않고 의료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적·입법적 개혁을 우선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연합회는 “정부는 의료 개혁 이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앞으로 5년 동안 국고 10조원과 건강보험 재정 10조원, 총 20조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면서 “이 정도의 재정을 간병 서비스 급여화나 생명과 직결된 중증 질환 신약 급여화 등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 투입한다면 국민과 환자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아래는 환자단체연합회 입장문 전문.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서 발표한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에 대한 환자단체연합회 입장
올해 4월 25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이하, ‘의료개혁특위’)가 지난 4개월 동안 4개의 전문위원회(의료인력, 전달체계·지역의료, 필수의료·공정보상, 의료사고 안전망)를 운영하며 의료개혁 방안을 논의했다. ‘의료개혁특위’는 지난 8월 30일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이하, ‘개혁안’)을 발표했고, 심도 있는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거나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과제는 ‘후속검토’ 과정을 거쳐 차후에 2차, 3차 개혁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의사 인력의 부족 및 배분의 불균형 문제, 의료 공급 및 이용 측면에서의 의료전달체계 왜곡 문제, 중증질환자와 희귀질환자의 서울Big5병원(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쏠림현상 문제, 필수의료 관련해 개원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입·당직 피로·의료분쟁 부담으로 병원을 떠나는 의사와 특정 진료과를 기피하는 문제, 환자의 합리적 의료 이용을 위한 정보 부족 문제 등 여러 이유로 현재 의료전달체계 및 필수의료·지역의료는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의료개혁특위’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보건의료인력 수급 추계·조정시스템 도입, 상급종합병원 일반병상 및 전공의 의존도 감축,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과 국가책임 강화, 환자 중심의 가치 기반 대안적 지불제도 도입, 4대 공공정책 수가, 지역의료를 지원하기 위한 지역의료발전기금 및 지역수가 신설, 환자의 합리적 의료 이용을 위한 알권리 증진, 의료사고 형사고소를 줄이기 위한 소통지원 및 의료분쟁 조정제도 혁신 등 개혁적인 방안을 도출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5년간 국고 10조원, 건강보험 재정 10조원 총 20조원 이상의 막대한 재정 투입” 계획 및 정부의 의지를 밝힌 ‘개혁안’을 발표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이하, ‘환자단체연합회’)는 이러한 ‘의료개혁특위’ ‘개혁안’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개혁안’에는 반년 이상 이어오고 있는 의료공백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속하게 추진해야 할 내용이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단체 입장에서는 동의하기 어렵고, 우려스러운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서 아래에서는 이에 대한 ‘환자단체연합회’의 의견을 표명한다.
⑴ 정부는 ‘의사인력 수급추계전문위원회’를 신속히 구성해 2026년 의대정원을 결정하는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정부의 의대정원 2천명 증원 발표와 이에 항의하는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의료공백 사태가 6개월 이상 이어졌으며, 중증질환자·희귀질환자와 응급환자들이 의료불안과 함께 질환이 악화하거나 생명을 잃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인 정부와 의료계, 방조자인 국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의료공백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공백 사태의 유일한 해법은 의대정원의 증원 규모를 조정하는 것이다. 다행히 ‘개혁안’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정부는 ‘의사인력 수급추계전문위원회’를 연내 신속히 구성해 과학적 근거와 투명한 절차를 통해 2026년 의대정원의 증원 규모를 결정하는 사회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2025년 의대정원 관련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종식하고, 앞으로 증원될 의사 인력이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의료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⑵ 정부는 응급실이나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는 경증환자의 본인부담금을 인상할 것이 아니라, 환자가 합리적 의료 이용을 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실손보험 개혁 및 비급여 관리 강화를 추진해야 한다.
환자의 합리적 의료 이용 행태는 올바른 의료전달체계 정립을 위해 필수적이다.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의 팽창, 실손보험과 결합한 불필요한 의료 남용은 환자와 의사 모두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 환자가 합리적 판단에 따라 의료 이용을 하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의료인, 의료비, 각종 평가 결과 등 관련 정보들이 충분하게 제공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응급의료기관 또는 상급종합병원 이용 환자가 합리적 의료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정보 제공 체계를 정립하거나 환자가 불합리한 의료 이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번 개혁안에는 경증 환자가 응급실이나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는 경우 본인부담금을 인상하는 안이 포함되어 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실손보험에 가입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 가난하거나 실손보험이 없는 환자의 경제적 부담만 가중된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정부가 실손보험을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러한 제도를 추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⑶ 정부는 환자안전을 위협하고 위헌적인 내용의 「의료사고처리특례법」를 제정할 것이 아니라 의료사고 피해자·유족이 의료인 대상으로 형사고소를 하지 않고 의료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적·입법적 개혁부터 우선 추진해야 한다.
‘의료개혁특위’는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환자와 의료진 모두를 위한 안전망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의료사고 피해자와 의료진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의료진이 의료사고 발생 시 이유와 경위를 의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고, 의료사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의료진의 유감·사과 등의 표현이 향후 수사·재판 과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채택되지 않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한다. 사망·중상해 의료사고 관련 의료분쟁 조정절차에서 의학적·법적 지식이 부족한 환자를 도울 ‘환자 대변인’(가칭)을 신설하고, 의료감정 과정에서 2인 이상의 의료인이 참여하는 ‘복수·교차 감정 체계’를 도입하며, 투명한 분쟁 조정을 위해 환자·소비자·의료인 단체 등이 참여하는 ‘국민 옴부즈맨’(가칭) 제도를 도입한다.
또, 의료사고 위험이 큰 필수진료과 전공의와 전문의를 대상으로 의료사고 배상 책임보험·공제 보험료 일부를 내년부터 지원한다. 불가항력 분만 의료사고에 대한 최대 보상한도를 기존 3천만원에서 3억원으로 늘린다. 분만 외에도 중증 소아, 중증 응급수술 등으로 불가항력 사고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검찰과 경찰도 의료분쟁 조정절차와 형사절차 간 연계를 통해 사실관계 확인부터 의료과실 여부에 대한 의학적 감정 결과들을 수사 과정에 활용해 대면 소환조사를 최소화하여 신속히 수사를 진행한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이번 의료사고 안전망 관련 개혁방안이 의료사고 피해자·유족의 울분을 해소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의료분쟁 감정·조정제도를 통해 신속하게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적·입법적 개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의료개혁특위’가 ‘후속검토’ 과제로 남겨 놓은 의료사고 형사특례 법제화 관련해 ‘환자단체연합회’는 환자안전을 위협하고 위헌적인 내용이 포함된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제정하는 것에는 강력히 반대한다. 이에 앞서 의료사고 피해자·유족이 의료인 대상으로 형사고소를 하지 않고 의료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적·입법적 개혁을 우선 추진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⑷ 정부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의료개혁을 제대로 추진해야 할 뿐 아니라,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도 힘써야 한다.
정부는 의료개혁 이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앞으로 5년 동안 국고 10조 원과 건강보험 재정 10조 원, 총 20조 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 정도의 재정을 간병서비스 급여화나 생명과 직결된 중증질환 신약 급여화 등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 투입한다면 국민과 환자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국민이 막대한 건강보험료와 세금을 부담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만큼, 정부는 이번 의료개혁을 제대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의료개혁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이 의대정원 2천명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와 의사의 강력한 항의를 무마하려는 선심성 지원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와 필수의료·지역의료는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으로 촉발된 전공의와 의사의 의료현장 이탈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그런데도 의료개혁은 필요하고, 정부는 환자와 국민이 그간 치른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이 개혁을 성공시켜야 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의료계뿐 아니라 환자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만일 이번 의료개혁이 그럴듯한 말의 성찬에 그치거나 환자와 국민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의사만이 아니라 환자와 국민 모두 등을 돌릴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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