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된 전두환의 '보도지침'...실존인물 김주언 기자는 "언론개혁은 미완"이라고 했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기자 김주언
오세혁 극작 연극 '보도지침' 관람
김주언·오세혁 "말의 힘과 책임 느껴야"
젊은 신문기자 '김주혁'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여성 대학생이 성고문을 당한 사건을 기사로 쓰려다 신문사 편집국장의 반대에 부딪힌다.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 위주로만 쓸 것. (신문) 1면에 싣지 말 것. (기사) 사이즈는 2단 이상 키우지 말 것. '성 고문 사건'이라고 하지 말고 '성 모욕 사건'이라고 완화된 표현을 쓸 것." 김주혁이 다니는 신문사 편집국장은 이 같은 지침을 흔들며 보도의 '균형'을 잡으라고 압박한다.
전두환 정권이 신문사와 방송사에 내려보낸 '보도지침'을 소재로 한 연극 '보도지침'의 한 장면이다. 김주혁의 실존 인물은 1986년 당시 한국일보 7년 차 기자로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한 김주언(70)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그는 전두환 정권이 기사의 내용·형식을 일일이 통제하려 언론사에 보낸 방대한 분량의 '보도지침'을 월간지 '말'을 통해 까발렸다. 연극 속 성고문 사건 역시 실존한다. 권인숙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인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연극 '보도지침'이 2016년 첫 공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아 무대에 올랐다. 이달 8일까지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지난달 31일 연극을 관람한 김 전 이사장과 대본을 쓴 오세혁(43) 극작가·연출가를 만났다. 김 전 이사장은 "(1980년대는) 언론의 권력화로 '제도언론'이 멸칭이던 시대여서 올바른 개혁이 절실했다"고 돌아봤다. 지금 언론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연극은 울림을 준다.
"연극 '보도지침'으로 언론 자유 가치 멋있게 인식돼"
연극은 실화를 바탕으로 '말'의 김종배 편집장 등 극중 인물들이 같은 대학 연극반 출신이라는 허구를 더해 재구성했다. 연극에서처럼 김 전 이사장은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고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는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많은 경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언론기본법을 근거로 문화공보부 장관이 언론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어 신문사를 없애겠다는 협박도 일상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1981년생인 오 작가는 희곡 집필을 제안받기 전엔 '보도지침' 사건을 알지 못했다. 그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당시 김주언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에 이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지도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반 설정을 넣은 건 "언론과 연극에는 말의 힘과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라고 늘 이야기하지만, 연극인들도 점점 소리내 말하지 않는 듯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우들도 언론의 자유의 가치에 공감하고 연극인으로서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서 (연극 '보도지침'에) 참여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오세혁 "연극 '보도지침', 하나의 운동이 되길"
김 전 이사장은 9년 전 '보도지침'을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기획자의 이야기를 듣고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가 멋있게 인식될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해 반겼다"고 했다. 언론의 자유는 그래서 지켜지고 있을까. 19년간 기자로 일하고 퇴직 후에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조직한 그에게 언론 개혁은 "미완의 과제"다. 그는 "직접적 지침은 사라졌지만 (정권이) 공영방송 사장을 교체하고 법적 대응을 통해 (보도의) 궤도를 설정하는 등 간접 통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쏟아내는 말을 언론이 확인·평가 없이 그대로 보도하는 것 역시 일종의 보도지침"이라고 했다.
이러한 언론의 현실은 시민들이 연극 '보도지침'을 관람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오 작가는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청소년 관객이 늘었고, 학교 공연을 허락해 달라고 연락하는 중고교생과 대학생도 많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 강제 해직당한 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에 관한 차기작을 구상 중이다.
연극 속 30대 '김주혁'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의 표정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저항하면서, 마침내 언젠가 웃게 될 그날을 상상하면서. 계속해서 오늘의 역사를 감당하는 것. 오늘의 무게를 질문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언론이다."
70대가 된 김 전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 권력의 랩도그(애완견)도, 어택도그(공격견)도 아닌 워치도그(감시견)로의 역할. 그것이 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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