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처럼, 손때 묻은 냄비에서 떠올린 ‘기억’···“식기엔 영혼과 우주가 담겨있죠”
10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철제 도시락통·식기로 만든 작품들
무채색 해골에서 화사한 꽃으로 ‘변화’
팬데믹 기간 “내면에 집중, 자연과 연결”
“낡은 식기를 보면 우주처럼 보입니다. 요리 자국, 스크래치 등 사용한 사람들의 흔적들이 남죠. 얼핏 보면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모두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다른 사물입니다. 사람마다 손금과 성격이 다르듯 식기들도 모두 다릅니다. 사람들의 기억과 영혼을 담고 있죠. 1000개의 식기를 조합해 작품을 만들면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 감정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철제 도시락통, 냄비, 그릇 등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두개골 모양의 설치작품, 대형 양동이에서 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스테인리스 식기들…. 인도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수보드 굽타(60)의 대표작들이다. 그는 인도인이 가장 많이 쓰는 도시락통 ‘탈리’ 등을 이용한 대규모 설치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매일같이 사용하는 식기들을 수백 개 쌓아 올려 해골이나 핵구름 형태로 만들어 친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느끼게 하며 성과 속, 일상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인도 비하르주에서 태어났고, 뉴델리를 기반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주목받고 있다.
그런 굽타가 변했다. 1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금속성 식기들이 내뿜던 무채색의 냉기 대신 빨강·노랑·파랑색 등 다채로운 색채를 입고 밝은 온기를 전한다. 지난달 29일 굽타의 개인전 ‘이너 가든’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굽타를 만났다.
신작 ‘프루스트 맵핑’ 시리즈는 프루스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프루스트 효과’에서 차용했다. 식기를 납작하게 눌러 캔버스처럼 평평하게 만든 다음 그 위에 파란색, 초록색, 연노랑 등 식기들을 그림처럼 얹어 놓은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마들렌의 맛과 감촉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굽타에겐 누군가 사용한 손길이 남은 식기가 그 역할을 한다. “어떤 식기의 바닥엔 가족의 문양이 찍혀있기도 해요. 혼수로 마련했던 식기들도 있죠. 식기들에 행복과 분노, 가족에 대한 추억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스며있어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야기들을 상상해봅니다.”
세월의 검은 때가 탄 낡은 냄비바닥에서 그는 ‘우주’를 발견하기도 한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저해상도로 찍어놓은 것 같다. 굽타는 “식기는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닮아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 많은 사연을 간직한 식기들은 어디서 올까. 굽타는 “인도에서 고철 장수들이 사용한 식기를 모아 녹인 뒤 벽돌과 같은 형태로 만든다. 식기가 녹아서 벽돌이 되기 전 고철장수로부터 가져온다”라고 말했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에 초대된 굽타는 부산에서 구한 냉면그릇 수백 개를 쌓아올린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꽃을 그린 회화와 숟가락을 구부려 꽃의 형태로 만든 조각 ‘이너 가든’ 시리즈에서 굽타의 극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이뤄졌다.
“팬데믹 기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어요. 고립되고 단절된 상황이긴 했지만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명상을 하고 내면에 집중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다시 붓을 들고 꽃을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각에도 색채가 들어가게 됐죠.”
회화 위주이던 인도 미술계에 대형 설치작업으로 변화를 일으켰던 굽타는 팬데믹 기간 다시 붓을 들고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명이 다해 시들어버린 꽃들이 마치 유동하듯 흐리게 그려졌다. 숟가락을 구부려 꽃과 잎의 형태를 만든 조각에선 따스함과 유머가 느껴진다. 금속 식기를 모아 차가운 해골을 만들던 그가 어쩌다가 숟가락을 구부리고 색을 입혀 꽃을 만들게 되었을까. “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죠.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영적이고 명상적으로 보게 됐습니다. 꽃과 가지, 줄기 등 자연적 요소가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를 바탕에 두고 만들었어요. 역경에 맞서는 인내심과 강인함, 회복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하 전시관은 인도의 ‘스투파’들로 채워져 시원적이고 명상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보관하던 탑에서 유래한 스투파는 불교도들의 무덤, 성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굽타는 오륙 년 전 라다크로 여행을 떠났다가 마주친 그 지역의 스투파 ‘초르텐’에서 영감을 얻었다. 라다크의 히말라야의 고지대에 흩어져 있는 초르텐은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자연과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굽타는 하얀 석고 속에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식기들을 박아 스투파를 만들었다. 죽은 이의 혼을 담고 기억하는 공간인 스투파와 사용한 이의 기억이 스며든 식기는 굽타에게 하나로 연결돼 있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굽타를 대표하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12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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