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역사… 연기 경력 900년 모인 햄릿의 ‘마지막 여정’

이태훈 기자 2024. 9. 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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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간 85회 공연 ‘햄릿’ 종연 현장

“우리 ‘배우’들만 이름이 없어요. 1, 2, 3, 4예요.” ‘배우 2′ 손숙(80)의 말에 무대 위 배우도 관객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연습 3개월, 공연 3개월 동안 엄청난 더위와 싸우면서 젊은 배우들과 함께했습니다. 보석을 한 주머니 얻은 것 같아요.”

연극 '햄릿'의 도입부, 각자의 의자에 앉은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로 걷던 '배우1' 역의 박정자(가운데)는 "춥다, 뼈가 시리게 추워"라는 짧은 대사로 무대와 객석을 한꺼번에 압도한다. /신시컴퍼니

1일 오후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석 달간 총 85회, 4만여 관객이 본 연극 ‘햄릿’의 마지막 175분이 지났다. 커튼콜 무대 위엔 연기 경력 60년을 넘나드는 연극계 ‘전설’들부터 처음 무대에 선 젊은 배우까지 모두 함께였다.

이 연극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역사였다.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만 14명. ‘선왕’ 역의 이호재·전무송(83) 배우와 ‘오필리어’ 역의 걸그룹 f(x) 출신 배우 루나(31)는 52년 차이였다. 박정자(82), 손숙, 김재건(77), 정동환(75), 김성녀(74), 길용우(69), 손봉숙(68), 남명렬(65), 박지일(64) 등 출연 배우들의 연기 경력을 다 더하면 900년이 넘을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700석 규모 큰 극장에서 정극을 장기 공연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빛난 건 대배우들의 투혼. 박정자가 ‘배우 1′, 손숙이 ‘배우2′, 김재건이 ‘무덤파기’를 맡아 함께 무대에 섰다. 도입부에서 유랑극단 무명 배우가 된 박정자가 특유의 발성으로 “춥다, 뼈가 시리게 추워”라고 짧은 대사를 뱉는 순간, 관객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끼며 무대로 빨려들었다. 이 대배우들이 보여준 것은 ‘나쁜 배역, 작은 배역은 없다. 오직 좋은 배우와 나쁜 배우만 있을 뿐’이라는 연극의 오래된 진실이었다.

우리 연극 대표 연출가 손진책(76)은 이전까지의 ‘햄릿’에 대한 이해를 전복하며 고요하지만 강렬한 무대를 보여줬다. 무대 위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뒤섞여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 유랑극단이 독살 장면을 재연할 때 선왕의 유령이 그걸 지켜보고, 햄릿이 죽인 신하 폴로니어스는 죽은 뒤 조용히 일어나 햄릿과 함께 퇴장했다. 햄릿이 사랑했던 여인 오필리어는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오빠 레어티즈와 햄릿이 제 시신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처럼 무대 위 관객과 배우도 뒤바뀐다. 극중극을 공연한 유랑극단 배우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무참한 죽음의 행진을 바라보는 무대 위 관객이 됐다.

시(詩)처럼 아름다운, 극작가 배삼식의 텍스트는 무대미술가 이태섭의 압도적 무대를 통해 더 빛났다. 3면이 반투명 격벽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때로 거울처럼 관객을 향해 말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비췄다. 절묘한 조명 활용으로 이 격벽 속 공간은 음모가 스멀대는 구중궁궐의 복도나 유령이 지나다니는 길이 됐다.

가장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 장면은 연극의 처음과 끝을 잇는 ‘숨’. 생명은 결국 ‘숨’이며 ‘호흡’이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무대에서 ‘후…’ 긴 숨을 쉬며 시작한 무대는 그 모든 죽음의 끝에 다시 한번 모든 배우들이 생과 사 구분 없이 ‘후…’ 긴 숨을 뱉으며 끝난다. 괴로움을 낳는 집착, 욕망의 허망함 같은 것들이 서늘한 안개처럼 충돌하던 이 무대 위에서, 삶과 죽음은 결국 둘이 아니었다. 연극은 자체로 차가운 불꽃이자 불타는 얼음 같았다.

‘배우 1′ 박정자는 극의 마지막 대사를 인용하며 커튼콜 인사를 전했다. “나의 모든 대사는 끝났다. 모든 것이 지나갔다. 이제 남은 건 침묵뿐.”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환호했다. 오래 기억될 무대에 걸맞은 가장 연극적인 피날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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