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타조와 맹수

김찬년 2024. 9. 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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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안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바란다.

그러기 위해 경제적 바탕이 필요한 것도 현실이다.

나도 좋은 기회를 잡기만 하면 '성공'에 닿을 것도 같다.

청소, 음식 조리 등으로 힘들게 일해 오다가 너무 손쉽게 돈을 버는 것 같아 "이거 불법적이거나 이상한 일 아니죠?"라고 물어본들 채용 담당 일당이 사실은 보이스피싱이라고 순순히 말해줄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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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 김찬년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 판사

많은 사람들이 안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바란다. 그러기 위해 경제적 바탕이 필요한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가 나에게는 돌아오지 않고, 쪼들리는 현실을 타개할 뾰족한 수도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 코인 투자, 영혼을 끌어모은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불안함을 극대화한다. 남의 소식 모른 채 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도록 하는 시절이다. 어서 저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영영 뒤처져 낙오하게 될까 두렵다. 나도 좋은 기회를 잡기만 하면 ‘성공’에 닿을 것도 같다.

이상은 필자가 떠올려 본, 무언가 께름칙하지만 달콤한 제안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일었던 물결의 방향이다.

속초에서 형사단독 재판을 할 때부터 춘천에서 형사 항소심 배석으로 근무하는 지금까지도 참 많은 젊은 사람들이 보이스피싱 수거책, 마약 ‘지게꾼’으로 잡혀 와 재판받는 모습을 본다.

간단한 서무보조나 서류 전달, 채권추심을 도와줄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통해 보이스피싱 수거책을 모집하던 수법이, 전혀 무관해 보이는 고액 시급의 에어컨 청소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는 광고를 내걸었다가 막상 연락해 보면 더 좋은 일자리가 있다면서 다른 일자리를 제안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그렇게 별다른 사회 경험이 없는 20대 젊은이들은 간단하고 쉬운 업무 내용에다가 시급까지 쏠쏠한 일자리에 혹하게 되고, 졸지에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되어버린다. 청소, 음식 조리 등으로 힘들게 일해 오다가 너무 손쉽게 돈을 버는 것 같아 “이거 불법적이거나 이상한 일 아니죠?”라고 물어본들 채용 담당 일당이 사실은 보이스피싱이라고 순순히 말해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법은, 무언가 께름칙하고 긴가민가한데 ‘에잇 모르겠다’고 행동에 나선 사람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보아, 처음부터 모든 사정을 상세히 알고 실행에 옮긴 사람과 똑같이 죄를 지었다고 평가한다. ‘불법적인 일 아니라고 하니까 아니겠지’, ‘수금하러 이리저리 이동하고 나도 나름 고생하는 거니까 이 정도 돈 벌만하지’라는 생각에 매달려 애써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어도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평가하기에는 충분하다.

동남아 국가에 가서 관광도 하고 그곳에서 간단한 물건을 받아서 한국에 돌아와 전달만 하면 100만 원 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실제로 다녀온 경우도 있다. 지금 당장 할 일이 없다면 그리고 그 일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 확실하다면 누구인들 솔깃할 만한 일 아닌가. ‘그런 손쉬운 일을 한다고 어째서 모든 경비까지 지원해 주고 추가로 100만 원을 준다는 것일까’하는 의아함, 불안함이 잠시 떠올랐지만 ‘긍정적’으로만 생각한 채 그곳에 다녀왔고 운반된 물건 안에는 필로폰이 포장되어 있었다. 졸지에 필로폰 수입상이 된 것이다. 필로폰을 수입한 경우 법에서 정한 가장 가벼운 형량은 징역 5년이고, 무기징역도 가능하다.

사회 경험이 일천하고 헛된 욕심에 일시 휩쓸려 수거책, 지게꾼으로 일한 사람들이 실제 손에 쥐는 돈이 그리 크지 않고 그 뒤에 숨은 총책 대신 무거운 처벌까지 받게 되므로 그들이 딱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은 이자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다 낮은 이자 상품으로 바꿔준다는 말에 속아 큰돈을 떼인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 마약의 병폐에 신음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바라보면 엄한 처벌을 거두기 어렵다.

맹수에 쫓기던 타조가 덤불 속에 머리를 숨기고 맹수를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 맹수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부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스러움을 외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 김찬년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 판사 △경북 영양 △인천 송도고 △서울대 전기공학부 △사법연수원 42기 △인천지법 판사 △서울 중앙지법 판사 △춘천지법 속초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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