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나석주는 왜 조선일보에 거사 계획을 알렸나
“범인이라 썼다” 비난 몰역사적… 맥락 무시, 역사 재단하는 사람들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나석주(1892~1926) 의사가 쓴 편지를 전시 중이다. 99~100년 전인 1924~1925년 쓴 편지 7점이다. 내달 9일까지 볼 수 있다. 1925년 7월 28일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지품(폭탄)은 준비되었는데, 비용 몇 백 원만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 뿐이지 안 될 리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나 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일제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황금정 2정목(을지로 2가)에서 권총 자결했다.
전시에선 볼 수 없지만 중요한 편지가 하나 더 있다. 의거 직전 거사 계획을 신문사에 알린 편지다. 받는 곳은 조선일보였다. 전시에선 ‘조선일보에 보낸 유서’라고 영상으로만 간략히 소개한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일보사 귀중. 본인은 우리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찾아 자유와 행복을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누리기 위하여 의열남아가 희생적으로 단결한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倭敵)의 관·사설기관(官·私設機關)을 막론하고 파괴하려고….’ 거사 대상과 계획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최후 힘을 진력(盡力)하여 휴대물품(携帶物品)을 동척회사·식산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기로…’라고 적었다.
나 의사는 왜 조선일보에 거사 계획을 알렸을까. ‘본인의 의지를 귀보(貴報)에다 소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기밀이 새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절대적인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에선 당대 민간 신문인 조선·동아일보가 나석주·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보도하면서 ‘범인(犯人)’이라 썼다고 비난한다. ‘의거(義擧)’라 쓰고 ‘열사(烈士)’라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투다. 당대 신문이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일제 통치를 찬양하는 일 아닌가. 엄혹한 보도 통제에 ‘범행’이라고 써도 당대 사람들은 모두 ‘의거’로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나 의사도 거사 계획을 널리 알려달라고 편지를 보내 부탁한 것이다.
나 의사는 편지에서 자결하려는 이유도 상세히 밝혔다. ‘본인이 자살하려는 이유는 저 왜적의 법률은 우리에게 정의를 주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불행히 왜경에 생금(生擒·사로잡힘)이 되면 세계에 없는 야만적 악형을 줄 것이 명백하기로 불복하는 뜻으로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12월 28일 희생자 나석주 올림’이라고 거사일과 자신의 이름을 명확히 밝혔다.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는 이들에게 이제는 세상을 떠나 말할 수 없는 당대 사람들은 한마디 변론도 할 수 없다. 나 의사가 조선일보에 보낸 편지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당대 기자들은 ‘도매금’으로 매도당해도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편지는 당시 사진기자 문치장(1900~1969)이 촬영해 간직하고 있었고, 해방 후 의거 21주년인 1947년 12월 28일 자 조선일보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의거 80주년인 2006년엔 독립기념관 전시에 나오기도 했다.
나 의사 편지는 적어도 당대 신문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밀을 지키고 이후에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경이롭다. 이들 모두 독립 투쟁을 함께 한 게 아닌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터이지만, 그렇게 험난한 시대를 건너 대한민국을 세웠기에 지금 그렇게 비난할 자유도 얻었다는 사실엔 수긍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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