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권력자의 물러섬은 때로 ‘굴복’이 아닌 ‘큰 용기’다
의료 개혁, ‘불굴의 원칙’만 강조해서는
혼란 수습 못 하고 의료계 동참도 못 끌어내
결국 의료 질만 떨어지면 개혁이 무슨 소용
꽉 막힌, 답이 안 보이는 난국(亂局)이다. 의료개혁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민도 답답하다. “의대 증원 마무리됐다”고 쐐기를 박은 대통령은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지역·필수 의료의 현장 주체가 돼야 할 의료계 반응은 싸늘하다.
의료개혁은 사실 정부로선 불리한 게임은 아니었다. 채 상병 문제나 명품백 이슈를 덮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는지는 모르나, 국민 지지는 꽤 높은 개혁 과제였다. 그런데 이젠 정부의 정책 역량 한계만 드러내는 형국이다. 왜 이리 꼬인 걸까.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일말의 해법은 없는 걸까.
모든 정책엔 제약 요소(constraint)가 있다. 그 제약 요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건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그런데 의료개혁의 방향은 무엇이고 제약 요소는 무엇인데,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의 전략과 로드맵 없이 거칠게 내지른 측면이 있음을 정부 쪽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마치 톱다운 방식으로 침대를 길게 짜놓고는 억지로 사람의 키를 늘여 맞추려 하는 식으로 비쳤다.
지금의 의료 상황에 대해 붕괴(崩壞), 대란(大亂) 등의 용어까지 쓰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며 “의료 현장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대통령의 말을 들었을 때는 뜨악했다. 대통령은 대체 누구에게 응급의료 현장 보고를 받는 건가. 우여곡절 끝에 응급실에 들어가도 수술할 의사가 있는지는 운에 맡겨야 하는 게 현실 아닌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더라도 정책의 일관성만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도 있다. 흔들림 없이 밀고 가야 하는 것도 있고 현실을 직시해서 유연하게 방향을 조정하는 게 옳을 때도 있는 법이다. 어느 원로 법조인은 이를 참새에 비유했다. 어떤 참새는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왔다가 투명한 유리창에 두어 차례 부딪힌 뒤 정신을 차리고 열린 문을 찾아 빠져나가지만, 어떤 참새는 계속 유리창에 부딪히다가 기진맥진해 죽기도 하는데, 지금 상황은 유리창만 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물론 대통령은 “기득권 카르텔과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자신의 소명으로 느끼는 듯하다. 역대 정부에서 아무것도 추진하지 않아 의료 현장이 왜곡되고 곪아 터진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전체를 싸잡아 카르텔로 규정하고 일거에 수술하겠다는 식의 접근은 아니었는지, 의료계를 이참에 손을 보겠다는 식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의료 파동은 어쩌면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간 의료계에 누적된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많은 국민들도 알게 됐다. 이는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공(功)’이다. 모처럼의 기회를 살려 가려면 대통령이 ‘불굴의 원칙’만 강조할 게 아니라 의료계의 마음을 달래고 개혁의 동반자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1년, 2년 못 버티고 의대생 전공의가 돌아온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전체적인 의료의 질이 떨어지면 이런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의료개혁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고 리더십의 문제다. 이 대목에서 드라마 ‘더 크라운’의 처칠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처칠은 런던을 덮친 그레이트스모그에 대해 처음엔 “안개일 뿐”이라며 무시했다. 내각 회의에선 날씨 문제 갖고 왜 그러느냐며 책상을 내리치고 격노도 했다. 그러다 실각 위기까지 몰렸는데, 자신의 비서가 앞이 안 보이는 스모그 때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조문한 병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즉석 기자회견을 갖고 “영국 대공습 이후 최악의 장면”이라며 의료인 확보와 공기오염 원인 독립 조사위 구성 등 대책을 발표했다. 언론은 ‘위기 속 진정한 정치인’ ‘전쟁 때의 그를 보는 듯’ 등의 제목으로 보도했고, 일거에 상황은 반전됐다.
대통령이 한발 물러서거나 돌아가는 지혜를 보이면 어떨까. 국민을 위해 의료개혁을 추진했는데, 실제 해보니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오히려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르텔 운운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것도 좋겠다. 의료 현장을 직접 찾아 “의대 증원은 각 의대 현실에 맞게 자율권을 주겠다” “의정이 함께 의료 발전 5개년 계획을 세워 보자” 등의 발표를 하는 건 어떨까. 그래도 의료계가 요지부동이면 그땐 여론이 등을 돌릴 것이다. 권력자의 물러섬은 때로 ‘굴복’이 아니라 궁극의 가치와 이익을 위한 ‘큰 용기’일 수 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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