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노인을 위한 운전대는 없다?
[더 보다 24회 I] 노인을 위한 운전대는 없다?
가로수 정비를 위해 도로변에 나란히 세운 차량들. 한 사람이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앞에 있는 차량 석 대를 들이받습니다.
이 사고로 작업자 두 명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 70대 초반 남성이었습니다.
<녹취> 경찰 관계자(음성 변조)
차를 좀 앞으로 이동해서 주차하려고 그 과정이었거든요.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생각하고 가속 페달을 밟은 거였죠.
지난 2월, 서울 은평구의 한 도로 한가운데로 돌진하며 14명의 사상자를 낸 SUV 운전자.
지난해 3월, 강원도 춘천에서 신호를 어기고 과속하다 3명을 숨지게 한 승용차 운전자. 모두 7~80대 운전자였습니다.
두 달 전 서울시청 앞 역주행 사고는 고령 운전자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키웠습니다.
<인터뷰> 정미경 / 한국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
사고 원인이 지금 페달 조작 오류로 밝혀지긴 했지만, 초반에는 이제 연령 기반으로 분위기가 많이 흐르면서...
점점 늘어가는 고령 운전자 사고, 어디서 해법을 찾아야 할까요?
■ “1톤 트럭만 7대째 운전”
산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작은 마을.
마을 토박이 81살 김길선 할아버지가 집을 나섭니다.
농사일을 놓지 않은 할아버지에겐 운전이 일상입니다.
<인터뷰> 김길선 / 81세
거의 날마다 운전대는 잡는다시피 해. 논에도 가야하고 뭐 이제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실어 오기도 해야항께. 1톤 차 그거는 아주 날마다 거의 (운전대) 잡는다...
좁은 농로에서 차를 거뜬히 빼내는 할아버지.
사고가 잦은 회전교차로에서도 사방을 살피며 능숙하게 운전합니다.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어언 55년.
<인터뷰> 김길선 / 81세
스물 여섯 살 때부터 면허증 따 가지고. 이제 전주 가서 땄습니다. 팔복동 시험장에 가서 땄어. (어떤 차 운전하셨는지 기억 나세요?) 1톤 차, 현대 차만 내가 지금 7대째여.
■ 평온하던 마을에 대형 사고…원인은 페달 착각
지난해 3월, 할아버지는 조합장 선거 투표를 하러 읍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참담한 사고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CCTV 화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편으로 1톤 화물차가 빠른 속도로 돌진합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에 7~80대 마을 주민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녹취> 김길선 / 81세
아수라장이라. 저기서 바깥에서 경찰들이 사고 나서 여기 못 들어간다고 해서 주유소에서 돌려 갖고 또 올라가붕거여. 이따 끝나면 (오라고).
사고를 낸 74살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가속 페달을 잘못 밟은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습니다.
<인터뷰> 김길선 / 81세
액셀에서 발을 떼면 그 자리에 딱 서요. 시동은 안 꺼져도. 그런데 당황해붕께 액셀 밟으면서 끊어붕께 붕~하면서 밀어버린 거 아니야.
■ ‘치사율’ 높은 고령 운전자 사고…면허 반납이 답?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가 내는 사고는 얼마나 늘었을까.
<인터뷰> 정미경 / 한국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
사고 건수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2013년도에는 (전체 사고의) 8.2%를 차지했는데 2022년에는 17.6%를 차지하고 있어서 거의 2배 이상 증가를 하였고요.
고령자가 사고를 많이 낸다기 보단, 고령화에 따라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가운데 고령자 비중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들어 운전면허 시험장을 찾는 사람은 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한상진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베이비부머 세대를 보면 2명 중에 1명 정도가 운전면허를 소지하고 있는데요. 그 세대부터 운전면허를 갖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전 세대는 운전면허 소지 비율이 한 30%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그 다음 세대부터는 60% 70%, 거의 90% 넘는 수준으로 계속 올라가죠.
고령 운전자가 내는 교통사고의 치사율은 다른 연령대보다 높습니다.
<인터뷰> 한상진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고령자가 사고를 유발하는 비율은 가장 높은 연령대다, 이렇게 보기는 어렵지만, 사고가 났을 때 중상이나 사망 사고일 가능성은 다른 연령대보다 좀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운전에 필요한 기본적 능력이 다소 저하되는 경향이 있어서...
경기도의 한 마을버스 회사.
이곳의 운전기사 92명 중 45%인 41명은 65세 이상입니다.
최고령인 78세를 포함해, 70대 운전기사도 15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상하 / 마을버스 회사 상무
마을버스에서 65세는 젊은 나이에 속하고요. 전체적으로 대중교통 기사 수급이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이분들이 안 계시면 저희 버스들이 정상적 운행이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분들도 그런 사고는 충분히 발생하고 있고, 고령자만 그 사고에 한정되는 건 좀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버스 기사들. 나이가 들며 쌓인 운전 경력이 오히려 안전 운전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박흥순 / 마을버스 기사 ‧ 66세
젊었을 때는 속도를 내거나 급하게 막 운전을 하는 경향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조금씩 조금씩 들면서 차분해지면서, 아주 주변도 잘 살피고 아주 많이 조심하기 때문에 사고 요인을 줄이는 편입니다.
고령 운전자에 대한 불안이 큰 건 알지만, 그런 시선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인터뷰> 설영희 / 마을버스 기사 ‧ 71세
70이 넘어서도 건강하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해요. 근데 그게 뭐 언론에 자꾸만 70 넘은 사람 고령자들 운전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러면 전체를 갖다가 그쪽으로 매도하는 거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65세 이상 운전자가 내는 교통사고는 매년 3만여 건.
고령자들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개인별 운전 능력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터뷰> 한상진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신체적 혹은 인지 반응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65세 이상 그룹에서도 편차가 굉장히 큰 것이라서 그걸 너무 일반화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여지고요.
잇따른 사고에, 일각에선 고령자들의 운전 면허를 제한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
그러나 연령 기준을 일괄적으로 적용해 운전을 제한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인터뷰> 정미경 / 한국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
고령 운전자의 이동성 문제가 삶의 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보건학적으로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고령 운전자분들이 운전을 안 하시게 됐을 경우에 보행자로서 일상 생활을 하시거나 또 자전거나 이륜차를 운전하시게 될 텐데, 그 경우 사고가 났을 때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높아져서 그런 사회적 비용도 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 ‘초고령 사회’ 일본의 고령 운전자 대책은?
19년 전 이미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
전방에 장애물을 감지하자 차가 자동으로 멈춥니다.
멈춰 있는 상태에서 가속 페달을 밟아도, 차량은 움직이지 않고 경고음만 울립니다.
고령자의 안전 운전을 돕기 위해 도입된 차량. 일본에선 ‘서포트카’라고 부릅니다.
<녹취> 미카미 쇼헤이 / 자동차 판매사 직원
후진하려다가 착각해서 기어를 전진에 넣어서 가속 페달을 꽉 밟았을 때도 (차량이) 멈추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2019년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도쿄 이케부쿠로 사고. 시속 90km로 돌진한 차량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모녀가 숨졌습니다.
88살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가속 페달을 잘못 밟아 벌어진 사고였습니다.
일본에서 고령 운전자의 페달 밟기 실수로 일어난 사망 사고 비율은 비고령자의 12배.
페달 오조작 사고를 막는 기술이 발전해온 배경입니다.
구형 차라도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를 쉽게 구입해 설치할 수 있습니다.
운전자의 치명적인 실수를 자동화된 안전 장치로 방지하고 있는 겁니다.
페달을 잘못 밟아 일어난 고령 운전자 사고는 우리나라에서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고령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사고에 대한 통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사고 원인을 면밀히 따져 대책을 세우기보다 ‘운전면허 반납’만 유도하는 정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뷰> 정미경 / 한국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
지금은 고령 운전자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좁은데요. 운전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거나 아니면 운전면허 반납을 하거나. 이런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데 다양한 운전 조건에서 제한적으로 좀 안전하게 운전하실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최근 일본에서는 시속 30km 이하의 저속 주행 상태에서도 가속 페달을 잘못 밟았을 때 급가속이 되지 않는 서포트카가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서포트카의 사고 건수는 일반 차량과 비교해 41.6%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현재 11개 제조사 162종의 서포트카가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서포트카만 운전할 수 있는 면허도 신설됐습니다.
고령자들이 보다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넓힌 겁니다.
<인터뷰> 히라츠카 토모유키 / 가나가와현 경찰본부 교통부 고령운전자 지원실장
안전운전 지원 장치가 있는 자동차에 한해서 운전할 수 있는 서포트카 한정 면허가 도입되었습니다. 안전 운전을 할 수 있는 분은 교통 안전에 주의하면서 계속해서 운전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한 고령 운전자가 운전기능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75세부터 운전면허를 갱신하려면 인지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 우리나라와 똑같지만, 일본은 2022년부터 일정 기간 내 교통 법규 위반 이력이 있는 75세 이상 운전자의 경우 운전기능 시험을 통과해야만 면허를 갱신해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야마모토 요시카즈 / 자동차학교 지도원
6가지 과제를 통과해야 합니다. 중앙선에 걸치거나 역주행을 하지는 않았는가? 오른쪽 발이 액셀 페달을 잘 조정해서 도로 턱 단차를 잘 올라간 후에 브레이크를 알맞게 밟을 수 있는가?
서포트카 등으로 고령자의 안전 운전을 지원하면서도, 사고 위험이 높은 운전자는 엄격하게 관리하는 겁니다.
<인터뷰> 이나바 쿠미코 / 77세
저의 평소 운전 실력이 상당히 엉터리였다는 걸 잘 알 수 있었어요. 자신감이 좀 떨어졌어요.
■ “운전 못할 정도 되면 인생은 거의 끝”
올해 안에 운전면허를 갱신해야 하는 김길선 할아버지.
최근 면허를 반납하면 어떠냐는 경찰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인터뷰> 김길선 / 81세
나이가 등게 반납을 하면 어떻겠냐고 그런 식으로 문의가 오더만. 그 사람들도 안전하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조만간 운전을 그만둘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 이후의 생활이 걱정입니다.
<인터뷰> 김길선 / 81세
운전 못 헐 정도 되면 인생은 거의 끝이지. 낙도 없고 뭣 헐 것이여 인자. 죽은 목숨이랑 같으지 뭐. 살아 있어도. 어디 가고 싶어도 내 차가 있어야 휘딱 가제. 걸어서 가겄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매년 30만 명 이상씩 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5백만 명, 2040년엔 천3백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한상진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OECD 보고서에 의하면 고령 운전자가 가급적 길게 운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전체적인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라는 정책 제언이 있습니다. 노인의 자유로운 이동이 사회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얘기인데요. 다만 고령 운전자가 운전할 능력이 안 되고 사고 위험이 큰 상황에서 운전하지 않도록, 그것을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그런 장치는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면허 반납을 유도하는 것만이 과연 유일한 방법인지, 고령 운전자 각자의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대책은 없는지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인터뷰> 정미경 / 한국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
저희도 지금은 젊지만 언젠가는 이제 고령자가 되잖아요. 개개인의 능력을 잘 판단해서 적절하게 또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계속 지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재기자: 김채린
촬영: 조선기 김민준 윤희진
영상편집: 이기승
그래픽: 장수현
자료조사: 김예은
조연출: 유화영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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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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