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돈 없이’ ‘몸 덜 쓰는’ 굴레에 갇힌 노인 여가활동
- 선호 여가 ‘공원 산책’ 19% 최고
- ‘경로당 방문’ 의외로 낮은 순위
- 사람 구경은 선호해 외로움 반증
- 경제적 문제부터 체력·인간관계
- 제약·한계 극복할 新여가 고안을
돈, 건강, 사람.
‘어르신, 뭐하고 노세요?’라는 물음에 부산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놓은 답이다. 이 세 가지 ‘제약’에서 자유로운 여가를 즐기고 싶다는 말이다. 국제신문 77번 버스팀이 지난 6~8월 부산 65세 이상 어르신 500명을 만나 설문조사를 진행해 얻은 ‘노인여가 키워드’이기도 하다.
청춘을 지나 황혼에 이르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노인기 여가를 좌우했다. 한창 벌이에 나섰던 때와 견줘 지갑이 얇아졌으니 되도록 돈이 들지 않는 재밋거리를 찾아 나섰다. 줄어든 활기를 되찾고자 스포츠나 운동에 관심을 뒀다가도 한 해가 다르게 굳어가는 몸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죽마고우끼리는 시시껄렁한 농담만 늘어놔도 즐겁다지만, 야속한 세월은 친구들을 하나둘씩 저 세상으로 데려갔다. 그러니 돈 적게 들고, 몸 덜 쓰고, 혼자 할 수 있는 활동에 손이 간다. 이들 제약에서 벗어나는 여가가 개발돼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노인 여가 ‘콤비네이션’
‘공원에서 산책하기’(19.4%)가 즐겨하는 여가로 첫 손에 꼽힌 이유다. 자유응답을 포함해 12가지 선택지 중에서 최대 3가지를 고르도록 한 결과다. 그 뒤를 이은 ‘신문·TV·유튜브 등 미디어 보기’(15.9%), ‘지하철·버스 타고 구경 다니기’(12.9%)도 궤를 같이한다고 보여진다. 혼자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몸 편한 여가들이다.
반면 낯선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는 진입장벽이 깔린 ‘경로당에서 놀기’는 2.7%, 같은 맥락에서 ‘노인복지관에서 놀기’도 4.53%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혼자도 가능하지만, 돈도 적잖이 들고 건강까지 해치는 ‘술 마시기’(2.3%)도 하위권에 속했다.
선호되는 세 여가는 복합적이다. ‘한 세트’로 이뤄진다. 도심 하천을 따라 산책하다 도시철도역에서 열차에 올라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 신문이나 유튜브를 보는 식이다. ‘지하철을 통해 월화는 양산, 목금은 서면 남포동 다대포 등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있다’는 한 응답자의 설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어르신(84·부산진구 개금동)은 여가 활동으로 앞선 세 활동을 꼽았다. 이런 방식으로 어르신들은 돈을 아끼고 건강을 챙기는 동시에 세상구경, 사람구경도 한다.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에는 성별 차이가 눈에 띄었다. 남성(213명) 중에는 ‘바둑·장기’를 여가로 꼽은 이가 9.72%로 제법 높은 수치를 보였다. 반면 바둑·장기가 여가라고 답한 여성(287명)은 한 명도 없었다.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은 이와 반대로 여성은 선호하고 남성은 꺼렸다. 이런 경향은 75세 이상 여성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어르신 사이에선 ‘복지관은 80대를 위한 시설’이란 인식이 자리하는 영향으로 짐작된다. 응답자 김모(73·연제구) 씨가 남긴 ‘복지관은 80세가 넘어야 가는 곳이라 젊은 노인이 갈 곳이 없다’는 의견이 이를 방증한다.
▮쓸 돈 없고, 쓸 곳도 없다
‘여가를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을 물었을 때 이들 제약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문제인지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 1번이 돈(36%), 2번이 건강·체력(30.6%), 3번이 함께 할 사람(12.8%)이었다.
돈, 즉 생계가 해결되지 못하는데 ‘여가는 무슨 여가’라는 의미일 터다. ‘먹고 사는 것이 좀 해결돼야 여가를 즐긴다’(여·79·사상구 학장동), ‘여가활동비용이 너무 부족하다. 자녀 관계도 나빠 용돈을 못 받는다’(82·해운대구 반송동), ‘노인연금을 높였으면 좋겠다’(81·서구 초장동), ‘노인일자리를 다양하게 해 달라’(여·70·동래구 사직동), ‘정부의 노후 대책 및 지원금이 부족하다’(77·수영구 망미동) 등 관련한 의견도 수없이 쏟아졌다. 응답자의 절반가량인 45.6%는 여가활동 경비가 부족 또는 매우 부족하다고 여겼다. 충분 또는 매우충분은 9.4%에 그쳤다.
비교적 돈에 대한 고민이 덜한 축인 어르신이라도 여가의 폭이 넓지는 못했다. 월 생활비로 3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쓰는 노인이든, 80만 원 이상을 쓰는 노인이든 공원 산책과 미디어 보기를 최우선적으로 꼽았다. 경제 활동도 하고 자녀 용돈도 받는 노인 역시 일도 그만두고 용돈도 못 받는 노인과 비교해 여가에 있어 별다른 경향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놀거리 자체가 다양하지 못하고 획일적이다 보니 ‘돈을 쓸 데가 없다’(82·연제구 연산동·월 생활비 80만 원 이상)는 것이다.
다만 생활 여건이 나은 어르신일수록 단순 걷기인 공원 산책보다는 장비 값이나, 회비 등이 수반되는 스포츠를 여가로 삼는 경향이 나타났다. 생활비 월 30만 원 미만 어르신의 스포츠 향유 비율은 4.6%인 반면 월 80만 원 이상의 어르신은 13.7%를 기록했다. 또 나이가 들수록 돈보다는 건강과 체력에서 제약을 느끼는 경향이 나타났다. 75세 이상 어르신은 건강·체력(35.2%)이 돈(31.8%)보다 문제라고 지목했다.
▮놀아줄 사람이 없다
‘친구가 다 죽어, 친구가 필요함’(84·부산진구 부암동).
어떤 여가든, 마음 맞는 지기와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울 것이다. 그런데 세월 탓에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게다가 세대간 간극이 점차 벌어지는 오늘날에는 손아랫사람들과 이야기 섞기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말 들어줄 이가 없으니 하루 하루가 무료하다.
결국, 혼자 놀아야 한다. 모든 어르신이 겪는 공통된 애로다. 특히 여가의 어려운 점으로 ‘함께 놀 사람이 없음’을 언급한 어르신들은 유독 ‘컴퓨터·스마트폰 게임’(14.8%)을 즐겼다. 공원 산책(16.9%)이나 지하철·택시 동네구경(15.5%)과 맞먹는다.
여건이 된다면 즐겨보고 싶은 여가로 ‘문화센터 가기’(14.7%)가 선호된 것도 이 같은 점이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문화센터 가기는 ‘국내·외 여행’(19.3%)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마음 강좌가 열리면 좋겠다’거나 ‘노인을 존중하는 주민프로그램 활성화’, ‘노인공동체 기간 확충’ 등 노인끼리 서로 터놓고 즐거운 이야기를 풀어놓을 만한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였다.
박민성 민생정책연구소장은 “이번 기획 시리즈 기간 부산 어르신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돈이 들지 않는 여가,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여가, 사람 구경할 수 있는 여가를 선호한다는 점이 명확하게 나왔다”며 “특히 지하철·버스 타고 구경 다니기를 선호하는 어르신이 높았다는 건 사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느끼는, 일종의 외로움을 반증한다. 앞으로 고안될 노인 여가는 이 같은 제약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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