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 빼고 이승만·박정희 과오 교묘한 희석…‘채택’ 노렸나

탁지영·김원진 기자 2024. 9. 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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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창랑호 납북 앞뒤로 배치…반공 우회적 옹호
베트남 파병·새마을운동 부정적 측면 한 줄 언급 등 단순화
“검정 통과·채택률 높이기 목표로 최대한 집필 기준 맞춘 듯”
공개된 새 역사 교과서 내년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할 새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결과가 지난달 30일 공개됐다. 관계자들이 새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의 검정을 처음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의 고등학교 한국사 1·2 교과서가 박정희 정부 시절 벌어졌던 베트남전 파병, 새마을운동의 부정적인 측면을 축소해 기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항공기 납북 사건을 교과서 탐구자료로 제시하는 등 1950년대 반공 정책을 옹호하면서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교과서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친일 인사를 우호적으로 기술한 것이 확인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1일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학력평가원의 고등학교 한국사2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에 대해 ‘경제 발전’의 측면만 강조해 서술했다.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현대화와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과 차관을 받았다” “베트남에서의 건설 사업 등에서도 한국 기업의 참여를 보장받게 되면서 우리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고 경제 개발 정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였다”고 쓰여 있다. 참전 군인의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 민간인 희생,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 문제에 대해선 한 줄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반면 지학사는 ‘베트남 파병의 비극, 라이따이한과 고엽제 피해자’라는 별도 탐구자료를 제시했다. 리베르스쿨도 ‘베트남 전쟁의 명암’으로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표시한 그래픽과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군 비행기 및 고엽제 후유증 기사 사진을 나란히 배치했다.

역사 교사 A씨는 통화에서 “역사 교육의 지향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며 “한국학력평가원은 경제 발전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사관과 비슷해 보인다”고 했다. 그는 “다른 출판사들은 과거사 청산과 평화,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한국학력평가원은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로 흔들리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실행했다는 측면도 서술하지 않았다. 한국학력평가원은 “6·25전쟁을 도와준 나라에 보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했다고 기술했다. 반면 동아출판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안정시켰다”고 썼다. 1966년 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베트남 파병 대가로 한국 정부에 보상을 약속한 ‘브라운 각서’ 내용도 사료로 첨부했다.

한국학력평가원은 박정희 정부가 1970년부터 추진한 새마을운동도 긍정적인 측면만 기술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메우기 위해 실시한 운동이지만 결국 농가 소득이 크게 향상되지 못했다는 점, 새마을운동이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됐다는 점을 배제했다. 한국학력평가원을 제외한 나머지 검정 교과서 8종은 모두 새마을운동의 한계를 함께 서술했다.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에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을 옹호하며 정치 탄압을 우회적으로 정당화하는 서술도 담겼다. 또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였던 조봉암이 선전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가 반공을 내세워 진보당을 해체하고 조봉암을 사형한 ‘진보당 사건’과 창랑호 납북 사건을 앞뒤로 배치해 정치적 탄압 측면을 희석했다. 다른 검정 교과서들은 ‘반공을 내세워 독재를 강화하다’(동아출판), ‘반공주의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다’(해냄에듀), ‘남한에서 이승만이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지학사), ‘반공주의 강화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리베르스쿨) 같은 소제목을 달아 진보당 사건을 다뤘다.

역사학계와 역사 교사들은 한국학력평가원 필진이 ‘교육부 검정 통과’와 ‘학교 채택률 높이기’를 목표로 삼고 교묘하게 교과서를 기술했다고 본다. 뉴라이트 성향에 가까운 필진이 모였는데도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 건국절 등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관점은 빼고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명암을 납작하게 서술하는 정도로 그쳤다는 것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통화에서 “필진이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과 달리 검정 기준에 맞춰서 썼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라며 “학교에서 교과서를 채택하는 비율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탁지영·김원진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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