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난해함에 헤매지 않게, 나림이 소설로 푼 ‘해설서’
- 서재필의 일탈과 센티멘털리즘
- 처음엔 선뜻 공감하기 힘들지만
- 니체의 책들 읽고 나니 이해돼
- 가장 많이 인용한 아포리즘은
- “버거운 일로 좌절한 자가 좋다”
- 단골집 등 사소함 속 행복 찾아
- 니체가 ‘미궁’이라 한 인간 사회
- 한편의 기막힌 가면극처럼 풀어
나림 이병주의 1970년대 한국 만화경 ‘행복어 사전’은 재미있다. 때로 묵직하다. 그리고 산만하다. 농담하듯 뭔가를 이야기하는데, 재미 말고 뭔가 속 깊은 이야기가 있는 듯한데, 한눈에 잡히질 않는다. “강렬한 드라마가 광화문 근처에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멜로 드라마로 꾸밀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가”라는 나림의 변명이 있었지만 그래도 석연치는 않다.
▮아! 니체
20대 초반 나는 경직되어 있었다. 서재필의 대책 없는 센티멘털리즘과 거듭되는 일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도덕률을 아주 쉽게 어기는 행동이나 때론 광기 같은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차성희-김소영-안민숙-정명욱-김소향-박문혜-임선희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로맨스가 부러워 시기 질투 탓에 집중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다들 먹고 사느라 아등바등하고, 기자 동료들은 살기(殺氣) 가득한 세상에서 직필(直筆) 고수하려 목숨 거는데 우리의 서재필은 허구한 날 연애질에 탱자탱자 노는 것 같아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나림이 툭툭 농담을 던지듯 뭔가 이야기하는데 그 농담이 지나치다고 여겼다.
나는 니체를 읽고 나서 ‘행복어 사전’을 다시 봤다. “아! 이 소설은 나림의 니체 해설서구나”하는 감상이 생겼다. 니체를 읽고서야 나림의 의도된 진행을 비로소 다소나마 이해했다. 서재필의 명정(酩酊)과 정사(情事), 휴머니즘과 센티멘털리즘 사이 곡예 같은 행각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의 오지랖과 로맨스와 스캔들을 슬슬 술술 읽으며 아폴론적 혜지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갈등과 상호작용, 그리고 결합을 읽게 된 것이다.
서재필의 따뜻한 마음의 오지랖은 바로 운명애(amor fati)이며, ‘행복어 사전’은 나림이 소설로 푼 니체 해설서라는 생각이 진해졌다. 나림은 천재의 광기를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가 이해하게끔 풀어준 것이다.
▮버거운 일을 하다 좌절한 자
아포리즘은 니체라는 천재의 광휘를 표현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난해하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소설과도 다르고 시와도 다르며 철학책과도 다르다. 니체를 읽으면 뭔지 모르는 일종의 흥분 상태를 느끼며 사상의 고양을 경험한다. 다만 아포리즘을 예술품으로 승화한 매력에다 다채로운 함축까지 더해져 오해 여지가 많다.
니체는 “자기를 숨기는 모든 자 중 나는 가장 깊이 나 자신을 숨기는 자”답게 본질을 가면으로 잘 덮고 있다. 난삽(難澁)한 레토릭은 통속화할 위험은 적지만 단장취의의 우려는 크다. 흥분만 하다가는 니체 산맥을 넘지 못한다. 책은 누구나 나름대로 읽는 것이지만, 훌륭한 향도가 절실한 대목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악령’과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통해 인간 심연의 고등수학적 문제를 산술적 시선으로 읽을 수 있도록 풀어주었듯 나림은 니체의 난해함을 ‘행복어 사전’으로 해설해 준 것이다.
나림은 니체 전문가다. 우선 가볍게 비틀며 시작한다. “나는 버거운 일을 하다가 좌절한 자를 좋아한다”는 대목은 나림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니체의 아포리즘이다. 나림이 ‘허균’과 ‘정몽주’를 쓰고, ‘천명’을 통해 삽상한 청년 장수 홍계남을 기리며,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최천중의 황당하고 다소 잡스럽지만 치열하고 진지한 나라 세우기 작업을 그린 것 모두 불가능한 일을 하다 실패한 인물을 아끼고 애틋하게 여긴 때문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그럼에도 ‘행복어 사전’에선 “니체는 버거운 일을 시도하다 좌절한 자를 좋아한다는 엉뚱한 말로 청년들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농담하듯 한다. 사실 사람은 무리를 해선 안 된다.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며 벅찬 일 힘에 겨운 일을 하면 실수하고 후회하게 된다. 불행은 제각기 감당할 운명이지 동정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따듯한 오지랖으로 무리한 선택을 거듭한다. 실수의 서사가 현란하다.
나림이 즐겨 인용하는 니체의 또 다른 아포리즘은 “사람은 혼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강물을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 한다”이다. 나림이 생각하는 초인(超人)은 바로 대해(大海)가 된 사람이다. 대해가 된 사람은 고소(高所)의 사상을 지녔다. 고소의 사상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높이의 경쟁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허망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외부와 떨어져 독수리 뱀과 함께 고독이란 심연에서 지낸다. 높은 산 동굴에서 수행 끝에 독수리의 자유와 용기, 뱀의 지혜를 얻어 하산한다.
솔개의 날개와 독수리의 눈이면 충분할 줄 알았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다시 산으로 오른다. 영겁회귀를 깨닫고 다시 인간세계로 내려온다. 신은 죽은 지 오래고, 기댈 종교는 없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영원의 모래시계는 되풀이되어 감긴다. 순환 논리에 따라 같은 것이 끝없이 반복되니 생을 긍정하는 운명애 사상으로 원숙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생의 매 순간이 그대로 절대 목적이다. 가수 김연자는 “인생은 지금이야. 나이는 숫자 마음은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고 불렀다. 음악을 사랑한 니체와 나림 모두 이 경쾌한 노래 ‘아모르 파티’를 좋아할 것이다.
▮디테일
“미(微)에 신(神)이 있다”. 사소한 것에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소의 사상을 추구하는 서재필이 자하문 터널 위 서민 아파트에서 다운타운으로 내려오며 늘 외는 대목이다. 행복은 일종의 분위기인데 그걸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디테일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림은 셰익스피어가 즐겨 했던 말 “마음속에 음악을 가지지 않은 자는 바보 아니면 악인이다”를 실천하며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넥타이를 멋지게 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멋진 제일보가 된다”는 말도 늘 염두에 두었다.
나림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다. 나림의 일상은 “미에 신이 있다”는 신조를 철저히 따랐다. 니체는 “구하는 데 지쳐서 나는 발견하는 버릇을 익혔다”고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 취향에 맞는 무엇을 찾는다면 그건 행복이다. 서재필은 생활의 지혜 중 하나는 단골집을 두는 것이라고 했다. 하다못해 단골집을 발견하는 것, 그 미에도 신은 있는 것이다.
니체는 속물 문화에 대해 강렬한 혐오를 표현했다. 니체가 말하는 속물이란 시류를 좇고 권력에 따르며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무리다. 속물은 세론(世論) 이상의 고상한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스스로 문화인이라 망상하면서 예술 본령을 이해 못 하고 생의 근원도 파악 못 한 채 시류·권세를 좇는다. 경박하고 보여주기에 능숙하다. 니체는 그런 천박한 박식을 거부하고 문학 철학 음악 종교 고전 하나하나를 깊게 연구했다. 서재필은 P라는 페더고그 은사와 권력에 아부하는 당대 지성이란 인물을 비판하며 속물 풍조에 혐오를 드러낸다.
▮명장의 기막힌 솜씨
니체는 인간이란 존재를 하나의 미궁(迷宮)으로 봤다. 니체 자신이야말로 탁발한 미궁적 인간의 전형이다. 모든 영웅은 그 미궁 속에서 몰락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 미궁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서재필의 좌충우돌은 고독한 사한(砂漢)이 미궁 속에서 허우적대며 몸부림치는 모습일 따름이다.
니체는 인생 사상 역사에서 모순의 오묘함을 체현한 사람이다. 천재가 광기에 휘말리는 광경은 그 자체로 모순의 박진성을 보여준다. 모순, 인간의 딜레마다. 성과 속의 모순, 디오니소스적 태도와 아폴론적 태도 사이 모순, 고매한 지성과 추잡한 욕정 사이 모순, 사람은 누구나 모순덩어리다. 술이 있을 땐 잔이 없고 잔이 있을 땐 술이 없는 것도 인생의 한 모순이다.
삶은 시원한 계곡물에서 느끼는 청량함과 비눗물 땟자국이 섞인 미지근한 목욕탕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요령부득 사이를 오가는 그 무엇이다. 깔끔함과 구질구질 함을 끝없이 오간다. 정신이 맑을 때는 물질이 결핍하고 물질이 풍부할 때는 정신이 피폐한 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나림은 그런 모순과 섭리와 인연을 ‘행복어 사전’에서 화려하고 절묘하게 묘사한다. 명장의 솜씨로 만들어 낸 한 편의 기막힌 가면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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