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MZ 사우나 열풍…죽어가던 목욕업계도 살아났다
- 2019년 사우나 다룬 드라마 계기
- 목욕탕 즐기는 2030 폭발적 증가
- 식사 메뉴 등 온라인 정보공유도
- 교토 100년 된 대중탕 ‘하쿠산유’
- 밤 9시에도 직장인과 학생들 북적
- 日업체 호황기 대비 1/10로 급감
- 업주들 내외부 시설 개선 등 노력
- 부산국제시장 인근 위치 ‘녹수탕’
- 시설 변신으로 젊은이 유입 증가
일본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의 100년 된 대중목욕탕 ‘하쿠산유’로 한 무리의 목욕객이 모여들었다. 국내 목욕탕이라면 문을 닫았을 밤 9시지만, 이곳은 해 저문 뒤부터 손님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입구 네온사인 아래로 비춰진 목욕객 면면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막 퇴근한 듯 정장차림을 한 회사원들, 책이 가득한 가방을 맨 학생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목욕객 태반이 중장년인 한국과는 차이를 보였다. 젊은이들이 찾는 공간답게, 한 세기 묵은 ‘노후건물’임에도 낡은 티는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단정하고 무난한 디자인이 목욕객을 반겼다.
젊은 목욕객들은 가볍게 샤워를 끝낸 뒤 ‘사활(サ活)’에 돌입했다. ‘사우나 활동’을 줄인 말이다. 순서는 대략 이렇다. 먼저 사우나실에 들어가 10분 정도 땀을 흘린다. 충분히 땀을 흘렸다면 가볍게 씻어낸 뒤 냉탕에 들어가 1~2분간 몸을 담근다. 마지막으로 휴식 공간에서 바람을 쐬며 5~7분간 몸을 식힌다. 이 과정을 3번 이상 반복하다 보면 ‘토토노우(ととのう)’를 느끼게 된다. ‘정돈되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심신이 안정된 상태에서 느껴지는 황홀감·고양감 등을 가리키는 사우나 용어다. 토토노우를 맛보는 게 일본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이다.
한국에선 보기 드물어진 ‘젊은 목욕객’이 백년의 노포에 있었다. 밤마다 사활에 열중하는 20~30대 목욕객이 이곳을 가득 메운다. 청년 세대의 새로운 목욕 문화가 형성돼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덕분에 쇠락의 길을 걷던 목욕 산업도 부흥으로 향하는 빛줄기를 따라 나설 수 있었다.
▮양국의 대중목욕사 ‘데자뷔’
“1980년대에는 하루 1000명 이상의 손님이 이곳을 찾았답니다. 유아부터 노인까지 연령도 다양했죠.”
하쿠산유는 교토 대중목욕사의 산 증인이다. 30여년 전 부친으로부터 이곳을 물려받은 요코야마 시게노리(67·사진) 대표는 “당시까지는 목욕시설이 열악한 집이 많아, 인근 주민 모두 대중탕에서 목욕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고 회상했다.
일본 목욕탕의 약 90%가 속한 ‘전국 공중욕장업 생활위생 동업조합 연합회(이하 전욕련)’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목욕탕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60~1970년대 무렵이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전국 1만7999곳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 교토에서는 500곳 이상이 성업 중이었다. 1975년 교토의 연간 입욕자 수는 무려 4009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대중탕의 전성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가정마다 목욕시설이 보급된 것이다. 대중탕을 찾는 목욕객 발길이 끊기며, 목욕산업은 급격한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1991년 전국 목욕탕 수가 1만 곳 밑으로 떨어진 데 이어, 2006년에는 5000곳 선마저 무너졌다. 2019년 팬데믹 사태가 벌어지며 쇠락은 더욱 가속화했다. 지난해 기준 일본의 전국 대중탕은 고작 1755곳. 전성기에 견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양길을 걷고 있는 한국 목욕장업과 궤를 같이 한다.
▮목욕탕 살린 ‘사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후의 흐름이다. 교토의 연간 목욕객 수가 2021년부터 돌연 회복세로 돌아선 것. 특히 젊은 목욕객이 눈에 띌 정도로 늘었다. 요코야마 대표는 “최근 ‘사우나 붐’이 일며, 젊은 목욕객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하쿠산유는 고객 절반이 20대일 정도”라고 설명했다.
부활의 신호탄은 만화 ‘사도(2011·타나카 카츠키 원작)’가 드라마화되며 쏘아 올려졌다. 이 작품은 사우나를 즐기는 것이 취미인 주인공이 일본 전역의 사우나 시설을 방문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2019년 방영과 함께 젊은 세대 사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부터 사활이 SNS의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어로 떠올랐다. 넓은 의미에서는 ‘사우나 체험 전반’, 좁은 의미에서는 ▷사우나 ▷목욕 ▷외기욕(바람을 쐬며 몸을 식히는 행위)을 반복하는 목욕법을 일컫는다.
‘사활인’들은 서로를 ‘사우너(サウナ-)’라고 칭한다. 이들은 목욕탕 정보와 이용 후기를 활발하게 공유한다. 2017년 11월 서비스를 시작한 웹사이트 ‘사우나이키타이’가 대표적이다. 사우나실의 개수나 실내 온도 등의 평범한 정보는 물론, ‘의자 소재’·‘매트 사용 가능 여부’·‘TV 및 만화책 비치 여부’까지 제공한다. 지난해까지 등록된 사우너들의 이용후기는 466만1730건에 달한다.
사우너들 사이에선 사활을 마친 뒤 먹는 ‘사밥(사우나 밥)’도 인기다. 땀을 흘리며 잃은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주로 염분과 열량이 높은 음식을 찾는다. 라멘·튀김·교자·덮밥 등 각자 선호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사술(사우나 술)’도 또 다른 매력으로 손꼽힌다.
특히 교토의 사우나 인기는 유난히 뜨겁다. 다른 지역은 목욕비와 별도로 사우나비를 징수하는데, 교토에서는 따로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기준 교토의 목욕탕 요금은 490엔. 한화 5000원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목욕탕과 사우나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사우나 붐’이 짧은 유행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목욕객 증가로 이어진 데에는 목욕탕 업체 대표들의 결단도 한몫 했다. 낡은 목욕탕 시설을 개·보수하고 사우나실을 설치하는 등 ‘목욕객 세대교체’에 나선 것이다. 요코야마 대표는 “사활을 즐기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사우나’·‘냉탕’·‘외기욕 시설’ 3종 세트를 갖춘 목욕탕의 인기가 높다”며 “이 영향으로 교토 목욕탕 대부분이 젊은 세대 취향에 맞춰 사우나실을 마련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세대교체에 ‘사활’ 걸어라
국내에도 목욕탕 쇄신에 ‘사활’을 건 이들이 있다. 이광섭(65) 대표는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대중목욕탕을 사들였다. 2006년부터 임대로 운영해온 ‘녹수탕(부산 중구 신창동)’을 자가로 매입한 것이다.
그는 “팬데믹 시기 많은 목욕시설이 문을 닫은 만큼 매입 당시 주변의 만류가 거셌다”며 “앞서 10년 이상 임대로 운영하며 느낀 점을 바탕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고 말했다.
녹수탕은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국제시장’ 인근에 위치했다. 자연스럽게 시장 상인들을 단골로 뒀다. 그러니 중장년층 목욕객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이 대표는 목욕탕 인수 직후, 오히려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춘 리모델링 공사에 나섰다. 장기적으로 손님이 자연감소하는 추세라 젊은 세대를 끌어 들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다.
공사를 위해 문을 닫자 단골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나왔다. ‘뭐하러 쓸 데 없이 공사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적잖았다. 그럼에도 세대교체를 향한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결국 2021년 6월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됐다. 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 인테리어 컨셉을 잡았고, 특별히 젊은 시공자에게 일을 맡겼다. 그 결과 칙칙하던 회색 벽은 흰색과 아이보리색이 조합된 밝은 분위기로 변모했다. 빗물 자국이 잔뜩이던 간판도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간결하고 깔끔한 디자인으로 탈바꿈했다.
이 대표는 포털사이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내부시설 사진을 비롯해 이용요금·운영시간·결제수단·제공서비스 등 상세한 정보를 등록했다. 그는 “대부분 동네목욕탕이 홍보에 무관심한 편이다. 남포동과 국제시장의 여행객들이 목욕탕을 찾을 때, 이용 후기 등 정보가 많이 공유된 우리 녹수탕으로 유입된다”고 말했다. 리모델링 이후 이곳에는 하루 평균 300명의 목욕객이 찾는다. 국제시장에서 의류매장을 운영하는 20~30대 사장들을 단골로 두는 등 젊은층의 발길도 점차 늘고 있다.
2021년부터 동네 목욕탕을 취재·기록해 오고 있는 안지현(여·47) 매끈목욕연구소장은 “일본은 LP를 틀어주거나, 생맥주를 제공하는 등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춘 목욕탕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깨끗한 수질과 감각적인 인테리어는 기본이다. 결국 동네 목욕탕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욕만의 나른한 매력에 젊은 세대가 이끌릴 요소가 더해진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영상= 김태훈 김진철 김채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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