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기 무섭다" 의정갈등 이후 첫 명절, 응급진료대란 현실화?
5일간 이어질 이번 추석 연휴(9월14~18일) 때 지금까지 한 번도 겪지 못한 수준의 응급진료 대란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전공의가 대거 떠난(2월20일)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연휴인데다, 서울·수도권보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지방으로 인구가 대이동 한다는 점, 응급실 근무 의사 수가 반토막 난 점, 배후진료(응급실 1차 진료 후 해당 과의 2차 진료) 공백이 커졌다는 점 등이 맞물리면서다. 여기에 정부가 동네 병·의원의 명절 진료를 강제 지정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의사들 사이에서 반발까지 거세다.
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11~25일을 '추석명절 비상응급 대응주간'으로 지정하고 △응급의료 전달체계 강화 △응급실의 진료 역량 향상 △후속 진료(배후진료), 전원 역량 강화 등 응급의료에 대한 집중 지원 대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중 이번 연휴에 '빈틈없는 진료체계'를 운영하기 위해 당직 병·의원 수를 평년(올해 설 연휴 3600개소)보다 많은 4000개소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다. 쉽게 말해 아프거나 다쳤을 때 동네에서 1차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연휴 때 문 여는 병·의원을 늘리겠단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들과의 마찰을 빚는 것으로 드러났다. 1일 대한응급의사회·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공동 입장문을 내고 "이번 연휴기간을 앞두고 병의원들에 내려온 공문을 보면 '연휴 기간 (진료 유지) 자발적 참여'라고 하지만, 불응할 경우 현장조사와 고발을 하겠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사실상 연휴 때 의사들이 휴진하지 못하게 하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의협이 회원들에게 보낸 복지부발 '연휴 기간 문 여는 병·의원 및 약국 지정·운영 지침'에 따르면 명절 연휴 기간 중 환자의 일차진료를 위해 응급의료기관 이외의 의료기관 중 최소한의 문 여는 병·의원을 지정·운영해야 한다. 문 여는 병·의원 지정권자는 복지부 장관,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 등이다. 특별시·광역시는 20만명당 계열(진료과목)별 최소 1개소가, 도 지역은 10만명당 계열별 최소 1개소가 연휴 기간에 문을 열어야 한다. 하지만 연휴에 문을 열겠다는 자원자가 없을 경우 어떻게 될까. 이 지침에선 "협의에도 불구하고 적정 수의 문 여는 병·의원을 지정할 수 없는 경우 '신청하지 않은' 의료기관 중에서 직접 문 여는 병·의원을 지정한다"고 명시했다.
만약 '문 여는 곳'으로 지정됐는데 진료 불이행 시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것. 이에 대해 의사들 사이에선 "읽어보니 가관", "이게 정말인가?"라며 날 선 반응이 쏟아졌다. 의사 A씨는 "예년엔 없던 '강제 지정' 지침이 생겼다"며 "정부가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응급의료 및 진료 체계가 문제없을 거라고 장담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고 비판했다. 의사 B씨는 "우리는 예비역도 아니고, 이번 추석에 해외여행도 예정돼 있다"며 혹시 지정될까 걱정했다.
매년 추석 연휴 땐 응급실 내원 환자가 연중 가장 많고, 평소보다 4배 이상 는다. 동네 병·의원 대부분이 연휴 내내 문을 닫아, 꼭 중증·응급이 아니어도 장염·독감 등의 환자가 응급실 말고는 '갈 곳'이 없어서다. 양혁준(2016~2017년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역임) 가천대 길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특히 이번 연휴 땐 의정 갈등 상황에서 이미 '번아웃' 된 전문의들이 평소보다 더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연휴 때 2~3일은 12시간씩 당직을 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길병원은 중증 응급환자를 수용하는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운영한다. 여느 응급실보다 규모·인력을 갖춘 곳이지만, 의정갈등 이후 전공의 20명 중 19명이 사직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17명 중 2명이 최근 사직하면서 15명 중 3명씩 팀을 이뤄 12시간씩 당직을 선다. 양 교수는 "의정갈등 전엔 전문의 1명당 전공의 2~3명이 팀을 이뤄 당직을 섰고, 당시 하루 150~200명, 추석 연휴 땐 600~700명이 센터에 내원했다면 이제는 전공의 없이 전문의 홀로 당직을 서는 데다 당직 주기도 짧아졌다"며 "내원 환자는 예년과 비슷할 텐데 이미 번아웃된 교수(전문의)들이 그 많은 환자를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토로했다.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아닌 일반적인 응급실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양 교수는 "적어도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6~7명은 있어야 응급실의 당직 체계가 무리 없이 돌아가는데, 주변 동료 의사들 말 들어보면 전문의가 단 1명만 남은 대학병원도 있다"며 "이번 추석 연휴 때 동네 병·의원에 가지 못해 응급실을 찾는 경증 환자까지 고려하면 응급진료 대란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배후진료의 전문의들도 번아웃돼, 응급실 환자를 넘겨받지 않으려 한다는 게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전언이다. 응급의학과 A 교수는 "전공의들이 떠난 이후, 배후 진료과에서 응급실의 콜 받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응급실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라며 "연휴 때 응급환자가 몰려들어도 배후 진료과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중간에서 우리만 치일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한편 지난달 30일 더불어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별위원회가 복지부를 통해 제출받은 전국 권역응급의료센터 내 전문의, 전공의 이탈 현황을 살펴본 결과, 지난해 4분기 기준 910명이었던 의사 수가 지난 21일 기준 513명으로 약 43% 줄었다. 거의 반토막 난 셈이다.
정심교 기자 simky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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