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는 영면에 들까 [윤지로의 인류세 관찰기]

한겨레 2024. 9. 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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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 울산을 찾았다.

고래바다여행선에 몸을 실었으나 고래는 보이지 않고, 일렁이는 파도에 울렁이는 속을 가까스로 달래고 있을 때 갑자기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짙푸른 바다가 흡사 고래 밭인 양, 수면을 박차고 고래 떼가 연신 튀어 올랐다.

옛날 울산엔 고래가 '천지 삐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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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앞바다에서 고래바다여행선에 승선한 관광객들이 돌고래떼를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어, 어…. 고래다!”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에 울산을 찾았다. 고래바다여행선에 몸을 실었으나 고래는 보이지 않고, 일렁이는 파도에 울렁이는 속을 가까스로 달래고 있을 때 갑자기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뱃멀미와 사투를 벌이던 승객들도 벌떡 일어나 난간으로 뛰어갔다.

한두마리씩 띄엄띄엄 머리를 내밀던 녀석들은 갈수록 출현 빈도를 높이더니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만큼 늘어났다. 짙푸른 바다가 흡사 고래 밭인 양, 수면을 박차고 고래 떼가 연신 튀어 올랐다. 조금 전까지 곽란에 패색이 뚜렷했던 아저씨도,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며 짜증 내던 10대도 달뜬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흥분했을까.

옛날 울산엔 고래가 ‘천지 삐까리’였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다종다양한 고래 그림이 그 증거다. 1900년 초까지도 그랬다. 미국 포경선이 기록한 일지에는 “아주 많은 혹등고래,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 있다. 셀 수도 없다”고 적혀 있다. 그 많던 고래도 근대적 상업 포경이 확대되며 자취를 감췄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상업 포경을 전면 금지하며 개체 수를 회복한 종도 있지만, 여전히 대왕고래나 귀신고래 같은 큰 고래는 우리 바다에서 감감무소식이다.

고래여행선의 갑판을 흥분으로 물들인 건 ‘야생’이었다. 조련사의 수신호와 그가 던져주는 전갱이에 훈련되지 않은, 거친 바다를 누비는 대형 포유류에 대한 경외, 다른 고래들도 저 먼바다 어딘가를 씩씩하게 헤엄치고 있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이 위대한 생명을 일순 멸종시킬 수 있는 타노스의 손가락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

지구는 크고 작은 멸종을 겪으며 지금까지 왔다. 동물을 멸종의 벼랑 아래로 떠민 건 기후였다. 판의 이동으로, 운석 충돌로 기후가 변하면 동물의 명멸이 뒤따랐다. 그 흔적이 지층에 남았고,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지질시대를 구분했다.

그런데 신생대 제4기는 뭔가 좀 달랐다. 우리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세계로 뻗어간 제4기 플라이스토세 이후 기후변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졌다. 여러 동물 중 유독 육지 대형동물의 멸종이 두드러졌다. 무게 1톤이 넘는 대형 초식동물 57종 가운데 46종이 사라졌다. 열대부터 동토까지 대형동물 개체 수가 93% 급감했다. 큰 동물을 잡기 위해 고안된 함정과 사냥도구, 그 사냥도구에서 나온 단백질 디엔에이 분석 결과가 향하는 소실점엔 인간이 있었다.

생태 피라미드 정점에 오른 우리는 이제 피라미드 자체를 주무른다. 사냥으로 멸종한 반달가슴곰이 복원사업으로 늘자 “누가 맹수를 산에 풀었냐”고 반발한다. 스웨덴에선 복원했던 불곰을 매년 수백마리씩 잡아들이고 있다. 원하면 늘리고, 싫으면 줄인다.

이때 다시 기후가 등장했다. 산업화 전보다 1.4배나 늘어난 온실가스가 수천만~수억년 전 그랬듯 종과 지역을 불문하고 생태계를 갈아엎고 있다. 대형동물뿐 아니라 곤충, 식물부터 바닷속 산호까지 지구 탄생 이래 여섯번째 대멸종이 오고 있다. 우리가 붙들래야 붙들 수 없는 생물이 매년 늘어난다. 우리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한주 부산에선 세계지질과학총회가 열렸다. 1년 전만 해도 부산 총회에서 현 지질시대인 홀로세를 마감하고 ‘인류세’를 선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인류세는 끝내 지질학계 벽을 넘지 못하고 땅에 묻혔다. 그래도 인류세는 영면에 들 수 없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더울 것이며, 더 많은 생명이 멸종위기종에 이름을 올리고 아스라이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세의 묘비에 적힐 ‘알아이피’(RIP∙Rest in Peace)의 첫 글자는 기억하다(Remember)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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