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74명이 추앙한 85세 노학자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어야"
후학들, 동서양 철학 망라 2,000쪽 철학서 헌정
"여기가 이남인가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 소년은 1947년 어머니 손을 잡고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김일성 치하에서 감옥을 드나들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남한에서 학교 갈 형편이 안 됐던 소년은 잠자리채로 공중목욕탕 탕에서 때를 건지고, 커다란 통 안에 온종일 앉아 전차표 파는 일을 전전했다.
"그랬던 내가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교수도 하고, 장관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돌짝밭에서도 진달래꽃 필 일이죠." 전화로 만난 이명현(85)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 명예교수는 자신의 85번째 생일인 지난달 1일 자서전 '돌짝밭에서 진달래꽃이 피다'와 학문 여정을 정리한 책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를 펴냈다.
후학·동료가 기리는 철학자의 85세수
국내 철학자 74명도 85세수를 맞은 노학자의 삶과 철학을 기렸다.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주도하에 각자 쓴 100쪽 이상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냈다. 동·서양 철학사 전반을 아우르는 총 4권, 2,056쪽에 이르는 '철학과 현실, 현실과 철학'으로 완성됐다.
책은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기념회에서 이 명예교수에게 헌정됐다. 그의 생일 축하연을 방불케 한 자리에서 백 명예교수는 "오늘날 철학계 기틀을 닦은 이 명예교수의 공에 마땅한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며 "책은 철학과 현실의 조응 관계를 밝히고자 한 노력"이라고 했다.
'현실을 외면한 철학은 쓸모없고, 철학 없는 현실의 개혁은 무모하고 좌초하기 쉽다'는 이 명예교수의 철학을 이은 것. 그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발표된 '5·31 교육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고 교육부 장관으로 이의 제도화에 힘썼다. 세계화, 민주화, 정보화 시대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학교교육을 혁신한 '5·31 교육개혁'은 지난 30년간 공교육의 기틀이 됐다.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문교부 장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안병영 연세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이를 두고 "철학자가 주도한 교육개혁"이라며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꾼 거시적인 사회개혁 성격을 갖는다"고 짚었다.
'철학과 현실'… 철학자를 사로잡은 화두
이 명예교수는 검정고시를 거쳐 1960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상적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논한 공자와 맹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막상 입학해보니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학계는 인간의 실존을 탐구하는 독일 관념론 철학이 대세였다.
이 명예교수는 이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분석철학에 천착하면서 현실에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엇에 몰두하며 철학적 탐구를 한다고 자임해왔는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철학은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내비게이션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모든 철학에는 시대가 반영되고, 시대를 뛰어넘어 사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명예교수는 1980년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서울대 교수에서 해직된 4년 1개월 동안 김영삼 전 대통령과 연이 닿았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김 전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을 썼다. 김 전 대통령의 미래 구상을 담은 '2000 신한국'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신한국' '문명의 대전환' '문명사적 도전' 같은 시대적 상징어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이 명예교수는) 시대정신을 꿰뚫는 예언자적 지성을 가졌다"고 했다.
이 명예교수는 1989년 "현실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철학을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계간지 '철학과 현실' 창간을 주도한 후 지금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오늘의 철학은 우리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를 더듬어 파고들어 가 도려낼 것은 도려내고, 수선할 것은 수선하며, 조정과 조절이 요구되는 것은 그에 맞는 처치를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철학도가 해야 할 과제이다." 한평생 치열하게 사유한 노학자의 마지막 조언이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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