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자” [김동진의 다른 시선]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2024. 9. 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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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쓸모’ 슬로건 내세운 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랑·결혼·가족제도 등에 대한 동시대 여성들의 생각 담아

(시사저널=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웃음의 쓸모'라는 슬로건을 내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가 올해로 26회를 맞아 8월22일부터 28일까지 총 7일간 개최되었다. 올해 CGV연남·CGV홍대·씨네큐브 등 3곳의 상영관에서 열린 여성영화제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1997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다. 

1회 개최 당시 9개국 38편의 상영작으로 출발한 여성영화제는 이제 38개국 132편 상영작으로 그 규모가 증가했다. 여성영화는 반드시 여성 감독이 만들거나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위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여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영화를 뜻한다. 이는 영화계에서 여성이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의미가 있다. 

영화 《모든 가족은 퀴어하다》 한 장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영화 《딸에 대하여》 한 장면 ⓒ찬란 제공

여성 영화 인력, 저예산 독립·예술영화에서 더 두각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는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만화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영화 산업에서 여성이 특히 적게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다. 벡델 테스트는 다음과 같은 3개의 요건으로 구성된다. 첫째,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둘째, 그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할 것, 셋째,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이다. 아주 단순해서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 테스트지만 의외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2023년 기준 흥행 30위 안에 든 한국 영화를 분석한 결과, 벡델 테스트 통과작은 12편으로 전체 영화 중 41.4%에 그쳤다. 나머지 영화들에서는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1명 이하이거나, 그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거나, 남성에 관한 대화만 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여성이 이렇듯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되면 그런 이미지가 무의식중에 대중에게 학습되고, 학습된 무의식은 곧 성별 고정관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미디어 중 영화에 여성이 어떤 역할로 등장하는지는 성별 고정관념 사회화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영화 산업 전반의 성별 불평등을 살펴보기 위해 2023년 영화계의 여성 핵심창작인력 성비를 비교한 통계에 의하면, 2023년 실질 개봉작(공연 실황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작품)의 여성 감독 비율은 22.8%, 여성 촬영감독 비율은 8.1%다. 그러나 순제작비 30억원 이상 상업영화 중에서는 여성 감독 비율이 2.7%로 낮아지고, 여성 촬영감독 비율은 심지어 0%가 된다. 감독과 촬영감독뿐 아니라 제작자·프로듀서·주연·각본가 등 핵심창작인력 비율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 인력들은 팬데믹 이후 늘어난 저예산 및 독립·예술영화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한 참여를 보였지만, 늘어난 여성 인력의 상업영화 진출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여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자는 여성영화제는 더욱 의미가 있다. 여성영화제에서는 최소한 벡델 테스트는 통과하고, 영화 안에 여성 혐오 표현이 등장하지 않으며,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담은 영화들만 7일간 상영한다. 올해의 슬로건인 '웃음의 쓸모'는 웃음이 지닌 다양한 힘에 세심히 주목하고, 현실의 조건 위에서 그 힘과 더불어 끈질기게 걸어가는 모두를 응원하는 영화제의 지향점을 담았다. 특히 전국의 모든 영화제의 예산이 절반으로 삭감된 올해, 웃음으로 삶을 견디고 버텨가자는 이 슬로건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올해 여성영화제 프로그램에는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이 혼합되어 있고, 외국 작품들과 한국 작품들, 장편과 단편, 애니메이션·극영화·다큐멘터리,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 과거 개봉작 중 관객과 다시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를 동시대의 맥락에서 발견해 상영하는 영화 등 다양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을 위주로 올해의 상영작을 살펴본다면, 공통적으로 '퀴어'와 '집'이란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20대 여성 이강희 감독의 영화 《모든 가족은 퀴어하다》는 감독 자신과 주변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다. 퀴어인 이 감독은 이성애자 친구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면서, 퀴어인 내가 이 축의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질투심을 느낀다. 이 영화는 커플이 함께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꼭 '결혼 제도'일까라는 감독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다양한 20대 여성의 목소리를 메인으로 사랑·결혼·가족제도 등에 대한 동시대 여성들의 생각을 들려준다. 그 생각들은 새롭고 때로 파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이야기다. 결혼하니 집을 구할 때 여러모로 유리했다는 여성들의 말은 또 다른 영화 《럭키, 아파트》의 메시지와 이어진다.

영화 《럭키, 아파트》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는 성별 편견과 고정관념 깨뜨리는 도구

티켓 예매 오픈 후 최단시간 매진을 기록한 강유가람 감독의 극영화 《럭키, 아파트》는 무리하게 아파트를 사서 이사한 레즈비언 커플이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작들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 우리 사회에 뾰족한 시선을 보여주었던 강 감독의 다음번 시선이 향한 곳이 아파트라는 사실은 주목해볼 만하다. 모두가 추구하는 공간인 아파트에 들어갔으니 그야말로 운 좋다거나 혹은 운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 기대하기 쉽지만, 바로 그 공간은 갈등과 문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때마침 실직과 부상을 당한 선우와 혼자 대출금 및 이자 부담을 떠안은 희서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랫집에서 악취가 올라온다. 결국 이 영화는 퀴어든 아니든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아파트, 대출금, 커플의 갈등, 혐오, 죽음 등의 키워드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다.

또 다른 상영작인 이미랑 감독의 극영화 《딸에 대하여》 역시 이러한 키워드를 넘겨받는다.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엄마는 딸로부터 목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엄마가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상황임이 확인되자 딸은 동성 애인과 함께 집으로 들어오고, 이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엄마와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게다가 엄마는 요양원에서 돌보는 치매 어르신의 모습에서 자신과 딸의 모습을 겹쳐 본다. 이 영화 역시 집·퀴어·죽음·모녀 관계 등의 키워드를 관통하며 관객들에게 다양한 생각할 거리, 말할 거리를 선사한다. 이미 4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 영화는 다음 주에 멀티플렉스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어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예정이다.

좋은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성별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영화 한 편으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고정관념을 갑자기 깰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관객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힘은 오락영화가 아니라 여성영화제 같은 곳에서 상영되는 독립영화들에 주로 달려 있다. 정부는 올해 각종 영화제 지원 예산을 지난해의 절반으로 줄였고, 특히 문체부는 지난해 12억원 수준이던 지역 영화 문화 활성화와 제작 지원 예산을 모두 삭감했다.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할 줄 아는 시민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에 도전하는 영화 속 목소리들을 확고히 계속 지지할 때 모두에게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삭감된 예산을 이제라도 복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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