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엔 배추밭, 서대문은 미나리밭...서울은 맛좋기로 소문난 농산물 산지였다 [서울지리지]
박지원(1737~1805)의 <연암집> 중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의 한 대목이다. 엄 행수는 도시의 온갖 더러운 똥을 수거해다가 농부에게 파는 이른바 똥장수다. 박지원은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珠玉)인 양 긁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도시가 깨끗해지고 또한 그 똥으로 농부가 질 좋은 채소를 키워 도시에 공급하도록 도우니 엄 행수는 자신의 덕을 더러움 속에 감춘 채 선행을 베푸는 숨은 성자(聖者)인 셈이다. 박지원은 그런 뜻을 담아서 똥장수 엄 행수를 예덕선생으로 높여서 불렀다. 동시대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도 연상된다.
예덕선생전은 18세기 후반 한양에서 성행한 상업적 농업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서울의 지역별로 품종을 특화해 전문성을 높이며 또한 도시에서 매일 배출되는 분뇨를 비료로 사용함으로써 작물의 품질과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으로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 납부하게 되면서 종전 지방에서 진상 받던 채소와 과일의 새로운 공급처가 필요해졌다. 급증한 한양 인구의 수요와 국가의 공물 조달을 충족하기 위해 한양 근교에서 채소와 과일의 대규모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박지원이 언급한 5곳은 모두 성저십리(城底十里·한성부의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들이다. 양주 석교와 송계원(松溪院·중랑구 묵동의 중랑천 변에 있던 국립여관)은 동대문에서 15리가 넘지만 여러 문헌에서 성저십리에 포함시키고 있다.
사실, 왕십리는 조선 전기부터 배추 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다른 지역은 시대별로 재배되는 작물이 변동이 있지만 너른 평야의 왕십리에서는 배추와 무 등 김장채소가 집중적으로 키워졌다. 성종대 학자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 ‘제7권’은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고 있으며 청파, 노원 두 역은 토란이 잘 되고 남산의 남쪽 이태원 사람들은 다료(茶蓼·여뀌)를 잘 심어…”라고 했다. 여뀌는 물가에서 자라는 식용·약용 식물이다.
집 지을 땅도 부족한 도성 안에서도 농사를 지었다. 과수 재배와 진상을 담당하는 장원서(掌苑署)는 도성 안팎에 큰 면적의 토지를 보유하며 과수를 직접 재배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의 <장원서등록(謄錄)>에 따르면, 장원서의 왕실 과수원은 도성 내 중학(中學·종로 중학동), 광화방(廣化坊·종로 원서동)을 중심으로 성저십리의 한강(한남동), 용산, 성저십리 외곽 경기 지역의 양주, 통진(김포), 부평, 교하, 고양, 강화, 가평, 남양(화성), 개성 등에 분포했다.
왕실 과수원은 처음에는 대궐 주변에 위치했지만 수요 충족이 힘들어지자 외곽지로 넓혀나갔다. <세종실록> 1428년(세종 10) 12월 9일 기사는 “서울 안의 과수원으로는 다만 창덕궁 서쪽의 협착한 땅을 쓰고 있으므로 각종 과목을 널리 재배하지 못하여 국가의 수용에도 부족하다”고 했다.
도성 내에서는 채소농도 성행했다.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형조판서, 우찬성을 지낸 이충(李沖·1568~1619)은 겨울철이면 자기 집에 커다란 토실(土室·온실)을 마련해 놓고 그 안에 채소를 심었다.
<광해군일기> 1608년(광해군 즉위년) 12월 10일 기사는 “(키운 채소로) 반찬을 매우 맛있게 장만해 아침, 저녁으로 바쳐 올렸고, 그로 인해 총애를 얻어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가 길에 오가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잡채판서(雜菜判書)라 지목하면서 너나없이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겼다”고 했다. 집에서 키운 나물로 잡채를 요리해 임금에게 바친 수준인데 가혹한 비난이다.
그러다보니 한양 동부지방에서는 채소시장이 섰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는 “장안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漁)라 하여 동부에 채소가, 칠패에 생선이 많다”고 했다. 왕십리와 답십리 평야에서 재배된 채소와 과일이 동부의 큰 시장인 이현(梨峴)시장에서, 서해에서 잡힌 생선이 한강을 거쳐 서울역 부근인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에서 팔렸음을 알 수 있다.
서소문 밖은 경찰청이 있는 서대문 미근동을 중심으로 미나리 밭이 벌판을 이뤘다. 이 지역의 지명은 미나리를 많이 재배해서 근동(芹洞)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지명 미근동(渼芹洞) 역시 “미나리(芹)가 물결친다(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국가에서 운영하는 잠실(蠶室·누에 사육시설)이 설치돼 ‘서잠실’로 불렸다. 세조 때 연희궁에서 군사훈련을 하다가 곡식을 상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조실록> 1463년(세조 9) 8월 3일 기사는 “좌상·우상으로 하여금 몰이를 하게 하니 군사들이 곡식을 짓밟아 상한 것이 많았다. 진무(鎭撫) 조맹춘도 밭 사이로 말을 달렸는데… 짓밟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 보게 해서 그 값을 내게 하였다”고 했다. 박지원이 말한 것처럼 연희궁에서는 고추도 집단적으로 키웠다. <동국여지비고>는 “고초전(苦草田)은 서쪽 연희궁 앞들에 있다”고 했다.
<문종실록> 1451년(문종 1) 11월 3일 기사는 “밤섬에 심었던 감초가 무성하니 내년 봄 각도에 나누어 심도록 하였다”고 했다. 밤섬은 여러 관서가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위한 채소밭도 자리 잡았다. 선조 때는 봉상시(奉常寺·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서)가 관리하던 밤섬 채소밭 절반을 훈련도감(訓鍊都監·한성부 수비군)에 떼어주자 두 관청 간 분쟁이 발생했다.
<선조실록> 1594년(선조 27) 10월 1일 기사에 따르면, 봉상시는 “종묘사직과 각 능의 제사에 소요되는 채소가 모두 밤섬 밭에서 가꾼 것을 쓰니 되돌려줘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전쟁 중에 어떻게 제사에 사용하겠는가. 훈련도감이 배분해 채소를 가꾸어 군사를 기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성북구에서 강북구와 노원구로 이어지는 동북지역은 산간지대가 대부분이라 채소보다는 과일농사가 주를 이뤘다. 도성과 인접한 성북동은 성북천이 만드는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있어 복숭아를 많이 심었다.
<동국여지비고>는 “북저동(北渚洞‧성북동)은 혜화문 밖 북쪽에 있다. 동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어 묵사동(墨寺洞),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한다. 주민들이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고 했다.
<한경지략>도 “성북동의 복숭아꽃 구경은 한양십경(漢陽十景)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고 했다. 조선시대 채석장으로 쓰였던 길음동 돌산 앞에는 앵두나무와 배나무가 많아 앵두나무골, 뱃골로 불렸고 하월곡동은 밤나무가 많아 율곡으로 통했다.
서울의 과일은 맛좋기로 이름났고 채소도 품질이 뛰어났다. 허균(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과일, 고기, 생선, 채소 등 팔도의 진미를 소개한다. 이 책에 한양 주변의 채소과 과일도 나열돼 있다.
이에 의하면, 앵두(櫻桃)는 저자도(압구정 개발 때 폭파한 중랑천 하구의 섬)의 것을 최고로 쳤다. 크기가 작은 밤 만하고 맛도 달다고 했다. 살구(唐杏)는 서교(西郊·서쪽 교외·서소문 밖 마포 일원)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두(綠李)는 서울 여러 곳에서 재배되지만 마찬가지로 서교의 것이 크고 맛이 제일 낫다. 고사리, 아욱, 콩잎, 부추, 미나리, 배추, 송이, 참버섯은 어디 것이든 맛이 좋으며, 가지, 외, 호박, 무도 마찬가지로 어디서나 나며 맛도 좋다고 했다. 토란은 서울에서 생산되는 것이 맛이 뛰어나지만 크기가 작은 게 흠이라고 했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5월 21일 실록은 “지금 목장 안 궁궐 채소밭 가까운 땅을 영양위(寧陽尉) 정종(1437~1461‧문종의 딸 경혜공주 남편)에게 지급해 담장을 가로질러 쌓았으니 목장 내 마신(馬神) 제단을 이전해야 마땅하지만 옮길 수도 없다”고 했다.
살곶이벌 내 왕실과 양반들의 채소밭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논란을 야기하며 그대로 존속됐다. <중종실록> 1518년(중종 13) 8월 9일 기사는 “(살곶이벌에) 목장을 설치한 것은 백성에게 그곳에 농사짓는 것을 금하기 위함이지만 밭을 일군 곳이 많다”고 했으며 <명종실록> 1556년(명종 11) 4월 27일 기사는 “(살곶이 목장에) 봄보리가 이랑에 가득하여 푸른 물결이 눈에 가득하다”고 했다.
아차산 남쪽의 낙천정(樂天亭·잠실대교 좌측편 한강변에 있던 정자) 주변, 즉 광진구 일대는 한양에 거주하는 사대부들의 대단위 농장이 많이 분포했다. 낙천정에도 잠실이 설치돼 연희궁의 서잠실에 대비해 ‘동잠실’로 호칭됐다. 동잠실의 토지도 인접한 살곶이 목장처럼 각 관청들과 왕실, 고관들이 차지해 채소밭으로 사용했다.
박지원은 채소농사를 잘 지으려고 “인분은 물론 동물 똥까지 보물 마냥 긁어모았다”고 했지만 그의 제자 박제가(1750~1805)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의아하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냇가의 다리 석축 가에는 마른 똥 덩어리가 군데군데 쌓여있는데 큰 장마 비가 아니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개똥이나 말똥은 항상 사람 발에 밟힌다. … 재도 완전히 길거리에 버려진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눈을 뜰 수가 없다. … 이것을 내버리고 전혀 사용하지 않으므로 수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여하튼 18세기 이후 조선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농업에서도 진일보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자료>
1. 조선왕조실록, 연암집(박지원), 장원서등록, 도문대작(허균),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유득공), 북학의(박제가)
2. 조선시대 성저십리의 농업. 이민우. 서울역사편찬원. 2019
3. 조선시대 서울의 의식주와 시민생활.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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