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뛰어요?

서울문화사 2024. 9. 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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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이 대세라길래 뛰어봤다. 5km를 뛰면서 든 생각은 하나. 이 힘든 걸 왜 할까. 러닝 경력도, 뛰는 이유도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물었다. 왜 뛰어요?

“몸무게가 103kg이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아니, 그럴 수는 있잖아요. 어떡해요 뛰어야죠.” 34세 직장인 남성 김지윤 씨는 2012년 처음 러닝을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 후 술과 배달 음식을 벗 삼았고 1년 뒤 거구가 되었다. 새내기 후배 중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기자 김지윤 씨는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나로 운동장을 뛰었다. 그는 5개월 동안 30kg을 감량했다. 물론 좋아하던 여학생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딛고 ROTC 53기로 임관한 김지윤 씨는 군 복무 기간 내내 특급 전사였다. 당시 김지윤 소위의 3km 구보 기록은 10분 40초. 대한민국 국군 특급 전사 기준 ‘3km 달리기 12분 30초 이내’를 여유롭게 웃도는 기록이다. 그는 직장인이 된 후에도 러닝을 놓지 않았다. 요즘은 일주일에 4회 이상, 한 달 평균 90km를 달린다. 흔히 말하는 ‘러너스 하이’ 때문일까? 김지윤 씨가 제로 콜라를 마시며 답했다. “러너스 하이요? 그건 만화 <원피스>의 원피스 같은 겁니다. 들어보긴 했는데 저는 느껴본 적이 없어요. 러닝하는 12년 동안 한 번도요.”

문예창작학과 출신 김지윤 씨는 보다 심오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간은 서사적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돌이켜보면 제 인생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열심히 뛰었어요. 당장 바꿀 수 있는 게 뛰는 것밖에 없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 거잖아요. 내 몸을 서사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운동, 그중에서도 가장 간편한 운동이 러닝이에요. 답답하거나 우울하다면 당장 제일 편한 신발 신고 나가보세요. 뛰는 게 힘들면 걸어도 좋아요.”

러닝 4개월 차에 접어든 이재현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러닝을 하면 내 장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패션 브랜드 이세의 COO로 일하고 있다. 이재현 씨가 뛰는 목적은 다이어트도, 트렌드 따라잡기도 아닌 ‘명상’이다. “일을 시작하고 한참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달리기는 명상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은 명상 대신 러닝을 합니다.” 이재현 씨는 러닝이 명상이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러닝을 하면 내가 숨 쉬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요. 당연한 일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숨 쉰다’는 걸 스스로 인지할 일이 생각보다 없어요. 달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한테 두 다리, 두 팔, 오장육부가 멀쩡히 있구나. 나는 온전한 사람이구나. 갖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이구나.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안도감이 들어요.”

이재현 씨는 러닝의 즐거움 중 하나로 ‘내게 맞는 장비를 찾는 재미’도 꼽았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기능성을 따지지만, 그 기능성을 실제로 테스트해볼 일이 적잖아요. 러닝화는 10m만 뛰어봐도 알아요. 브랜드마다 미세하게 발볼 너비, 쿠셔닝이 다르거든요. 어떤 신발을 신느냐에 따라 기록도 바뀌고요.” 발볼이 넓고 발등은 높은 이재현 씨는 여러 브랜드를 거쳐 지금은 한 신발에 정착했다. 그가 지난 주말 착용한 신발은 아디다스 아디오스 프로 3다.

“잘 뛰어지니까 재밌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살을 빼야 돼요.” 33세 비디오그래퍼 조상민 씨가 웃으며 회상했다. 5년 전 조상민 씨의 몸무게는 113kg이었다. 코로나19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그는 ‘할 게 없어’ 살을 빼기 시작했다. 줄넘기로 시작해 웨이트-크로스핏-러닝까지 왔다. 현재 그의 몸무게는 80kg. 조상민 씨는 2022년부터 매년 풀마라톤을 뛰고 있다. 올해 초 출전한 서울마라톤에서의 기록은 4시간 30분대다.

“저는 초보자일수록 카본화를 추천합니다. 뭐든지 잘하면 금방 재미를 붙일 수 있으니까요.” 조상민 씨가 뛰는 이유는 단순하다. 즐거우니까.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 뺨을 스치는 바람, 집에 돌아와 찬물 샤워 후에 마시는 탄산음료가 가장 큰 원동력이다. 조상민 씨는 요즘의 러닝 붐이 반가운 한편, 염려되는 것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러닝은 아직 전통이랄 게 없잖아요. 문화에 대한 이해도 적고, 합의된 규칙도 없죠. 러닝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운동이지만, 무리 지어서 크게 노래 틀고 소리치는 젊은 크루 보면 마냥 좋아 보이지만은 않아요.”

나는 조상민 씨에게 특히 러닝을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제가 아는 러너 한 분은 공황장애 때문에 러닝을 한대요. 고통의 역치 값을 올리는 거죠. 러닝의 핵심은 언제 멈출지 스스로 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도 더 빨리 뛰라거나 멈추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나랑 싸우는 운동이에요. 군대 전역하면 뭐든 해낼 것 같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러닝을 하다 보면 실제로 효과가 생겨요. 장담합니다.”

이번 기사를 작성하면서 러닝을 시작했다. 러닝메이트를 자처한 김지윤 씨는 전체 5km 코스 중 마지막 남은 100m를 힘껏 달릴 것을 강요했고, 질주가 끝나면 심장 소리가 관자놀이까지 울려댔다. 김지윤 씨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초보자도 숙련자도 숨이 차는 건 똑같아요. 분명 나는 성장하고 있는데, 러닝이 끝났을 때 상태는 똑같죠. 그게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김지윤 씨는 러닝 도사가 할 법한 말을 했다. 실제로 날씨와 신발에 따라 기록은 달라졌지만, 끝나고 나서 힘든 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생각한다. 이 힘든 걸 왜 할까? 어쩌면 그 답은 처음부터 질문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ditor : 주현욱 | Photography :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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