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해군력 증강 열풍에도 한국은 방산기업 밥그릇 싸움 방치
당장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의 상황만 살펴봐도 해군력 증강 열풍이 얼마나 거센지 알 수 있다. 중국은 1만3000t급 대형 구축함부터 7500t급 방공 구축함, 4000~6000t급 호위함을 그야말로 찍어내듯 건조하고 있다. 최근 중국 조선소에서 진수되는 중대형 전투함만 한 해 10~20척에 달한다.
中·日 건함 경쟁 본격화
당초 계획대로라면 방위사업청은 7월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초도함을 발주했어야 한다. KDDX 사업은 7조8000억 원을 들여 8000t급 신형 구축함 6척을 개발 및 배치하는 게 뼈대다. 최첨단기술이 적용된 이들 구축함은 현용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이상의 성능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 해군력 증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함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당초 7월 상세 설계는 물론, 초도함 건조 기업 선정 및 계약이 이뤄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이 사업을 둘러싼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다툼이다.
KDDX 초도함, 7월 발주했어야 하는데…
2020년 5월 입찰공고가 나온 KDDX 사업은 같은 해 8월 HD현대중공업이 93.7882점을 받아 93.7317점을 획득한 당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누르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대우조선해양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왕정홍 당시 방위사업청장이 HD현대중공업 측에 유리하도록 규정을 바꿨다며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아울러 2012~2015년 발생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사건에 HD현대중공업 임직원들이 개입됐다며 고소·고발전을 시작했다. 현재 한화오션 측은 2020년 8월 KDDX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당시 방사청이 보안 감점 관련 규정을 HD현대중공업에 유리하도록 바꾸는 바람에 자신들이 0.0565점 차이로 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보안 감점을 받은 HD현대중공업이 기본 설계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상세 설계와 초도함 건조를 수의계약으로 가져가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다만 방사청의 보안 감점 관련 규정 수정은 KDDX 사업 입찰이 시작되기 전인 2017년 6월 대우조선해양, ㈜한화, 한화시스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한항공, 현대중공업, 퍼스텍 등 7개 기업의 공동 민원에 따라 2018년 3월 국민권익위원회 권고로 이뤄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KDDX 입찰 기간 중 방사청이 의도적으로 사업 규정을 바꿨다는 주장은 맞지 않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법원은 2020년 10월 당시 대우조선해양이 방위사업청을 상대로 낸 우선협상대상자 지위확인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이듬해 감사원은 한화오션이 방사청을 상대로 낸 국민감사청구를 기각했다.
방사청·법원·감사원이 문제 제기를 모두 기각하자 한화오션은 "2015년 군사기밀 유출 사건에 HD현대중공업 임원이 개입했을 것"이라며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접수한 지 14개월 만인 올해 7월에서야 왕정홍 전 방사청장을 소환 조사했다. 원래 방산비리 수사는 검찰이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분야다. 그러나 2022년 4월 더불어민주당이 이른바 '검수완박'으로 불리는 형사소송법 및 검찰청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방산비리 수사가 경찰로 이관됐다. 이에 처리해야 할 사건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탓에 경찰의 사건 수사가 더딘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원래 KDDX는 8월부터 세부 작업이 시작됐어야 하는 사업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2027년 초도함 선체를 완성하고 2028년 진수해 2030년까진 해군에 인도돼야 한다. 업체 간 진흙탕 싸움과 지지부진한 수사로 사업 일정이 얼마나 더 늦춰질지 알 수 없게 됐다. 만약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개념설계 검토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5~7년 이상 사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해외 방산 수주에 악영향 우려
더 심각한 문제는 두 업체가 치열한 갈등을 벌이면서 10조 원 규모의 호주 차기 호위함 사업과 7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차기 잠수함 사업에서 각각 '원팀'으로 참가한 일본이나 독일에 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KDDX 사업 지연이 한국 안보는 물론, 천문학적인 경제 손실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좁게 보면 방사청의 사업 관리 능력 부족, 넓게 보면 정부와 정치권의 관심 부족이다. 두 업체 모두 K-방산에 세계적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많은 투자를 해왔다. 특히 KDDX는 최첨단 위상배열레이더와 통신·전투체계, 무장체계, 추진체계 등 첨단 군사과학기술을 구축함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에 통합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을 성공시키면 회사 역량과 명성을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중대한 프로젝트다. 두 업체 중 어느 쪽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라는 얘기다.
정부와 정치권이 나설 때
과열된 경쟁으로 국익이 훼손될 수 있다면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해결해야 한다. 안정적인 무기 수급과 과다 경쟁을 막기 위해 전투용 항공기는 주로 록히드마틴에, 지원용 항공기는 보잉에 맡기는 미국식 사업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변화를 위해선 국방예산 자체가 크게 증가해야 한다. 늘어난 건함 사업을 각 업체에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전력 증강과 기술발전, 방산 경쟁력 제고라는 효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다. 이는 최근 동아시아 바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해군 군비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KDDX 사업은 단순히 배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KDDX는 대한민국 생명줄인 해상 교통로를 보호하고, 이지스함과 함께 적 핵미사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최상위 전략자산이다. 이런 중요한 사업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을 정부와 정치권이 계속 방치해선 안 된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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