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는 왜 한국 ‘고딩’에 꽂혔나 [경기장의 안과 밖]
이번 여름 축구 이적시장을 뜨겁게 만든 고등학생이 있다. 강원 FC에서 뛰고 있는 2006년생 양민혁이다. 양민혁은 이번 시즌 K리그1에서 보여준 맹활약을 발판으로 토트넘 홋스퍼 입단을 확정했다.
강원 FC와 토트넘은 7월28일 각각 구단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적 소식을 공식화했다. 양민혁과 토트넘의 계약기간은 2030년까지다. 양민혁은 올해 강원에서 잔여 시즌을 치른 뒤 내년 1월부터 토트넘에 합류한다. 양 구단은 이적료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보장된 금액만 400만 유로(약 60억원)로 알려졌다. 계약서에 명시된 추가 옵션까지 포함하면 70억원이 넘는다.
이적료는 K리그에서 유럽으로 직행한 역대 사례 중 최고액이다. 2002년 송종국(부산→페예노르트), 2003년 이천수(울산→레알 소시에다드)의 유럽 진출 당시 이적료(400만 유로)와 같지만, 그 배경은 하늘과 땅 차이다. 송종국과 이천수는 2002 한·일 월드컵 활약상에 따른 후광효과가 다분했다. 당시 두 선수의 나이는 20대 초중반이었다. 양민혁은 18세에 불과하다. 국제대회 경험도 거의 없다. A 대표팀에 선발된 적도 없다. 17세 이하 대표로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에 출전한 것이 전부다. 토트넘은 그야말로 양민혁의 잠재력에 투자했다.
토트넘만 양민혁을 주목한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1부)와 챔피언십(2부) 팀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6월 들어 토트넘이 뛰어들면서 영입전 규모가 달라졌다. 이적 협상 막바지에는 리버풀까지 참전했다. 선택지가 많아진 양민혁은 최종 행선지로 토트넘을 택했다. 대선배 손흥민이 기반을 잡았고 대도시 런던을 연고로 하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두 달여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강원이 끌어낸 실익은 적지 않다. 이적료와 셀온(향후 양민혁 이적 시 이적료 중 일부 금액을 수령하는 계약) 외에 강원 구단 직원의 토트넘 연수, 유스팀의 영국 전지 훈련 등이 추가됐다.
2024년이 시작될 때만 해도 양민혁이라는 선수를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요즘 K리그 대세인 준프로(만 18세 이하 학생 선수와 맺는 사전 프로 계약 제도) 계약을 체결한 유망주 중 한 명으로 인식되는 정도였다. 강원 윤정환 감독도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진행한 1군 전지훈련에 양민혁을 포함시킬 의사가 없었다. 김병지 대표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해 양현준을 셀틱 FC로 이적시키며 이적료 수입 35억원을 올린 경험으로 유망주 활용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재능을 가진 선수가 1군에서 빨리 폭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구단의 몫이었다. 김 대표이사가 직접 윤정환 감독을 설득했다. 양민혁은 튀르키예 출발 직전 추가 인원으로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훈련지에서 진행된 러시아·동유럽 유명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양민혁은 단연 돋보였다. 윤정환 감독도 생각을 바꿨다. K리그1 개막전부터 양민혁을 기용했다. 어시스트를 올리는 것으로 기대에 부응한 양민혁은 2라운드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발전 속도가 눈에 띄었다. 8월11일 현재 양민혁은 26경기에서 8골 5도움을 기록하며 공격포인트 5위에 올랐다. 양민혁의 맹활약을 등에 업은 강원은 K리그1 선두를 달리며 구단 역사상 첫 우승에 도전 중이다. 지난 시즌 강등 위기를 겪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상전벽해 수준의 반전이다. 강원이 돌풍에 그치지 않고 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면, 양민혁은 최연소 영플레이어 수상은 물론 MVP(최우수선수)까지도 넘볼 수 있다.
만일 양민혁이 준프로 계약을 못하고, 전지훈련에 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쯤 대학 진학을 알아보는 처지였을 것이다. 평범한 고3 선수로 머무르는 것과 유럽 빅리그 진출을 눈앞에 둔 선수의 경계선은 사실 한 끗 차이였다. 대표이사의 안목과 감독의 결단이 선수의 인생뿐만 아니라 구단의 형편까지 달라지게 만든 셈이다.
“10대 선수 프로필만 요구하고 있다”
유럽 축구계의 시선에도 변화가 있다. 유럽 주요 클럽 및 에이전시와 일하는 한 관계자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A매치 출전 경력이 있는 20대 초반 선수의 프로필에 관심을 보였던 유럽 구단들이 이제는 10대 선수들의 프로필만 요구하고 있다”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축구 금메달을 땄을 때만 해도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유럽행 성사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병역 문제를 해소한 다수의 선수들이 유럽행에 속도를 낼 거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금메달의 주역 중 실제 유럽에 진출한 선수는 고영준(포항→파르티잔)뿐이다. 백승호(전북→버밍엄 시티)와 설영우(울산→츠르베나 즈베즈다) 사례가 있지만, 두 선수는 연령 초과 선수인 와일드카드였다. 아시안게임 참가 선수 나이는 만 22~24세다. 유럽 축구계는 이 연령대에 30억원 내외 이적료를 투자하는 것에 회의적인 분위기다. 효율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20세 이하 유망주를 영입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A대표팀 경력이 없어도 잠재력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지난해 여름 2003년생 배준호가 스토크 시티로, 2004년생 김지수가 브렌트퍼드로 각각 이적했다. 배준호는 이적 직후 곧바로 팀의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김지수는 B팀(2군)에서 1년간 경험을 쌓은 뒤 올해는 1군에 포함돼 프리미어리그 데뷔를 앞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 선수에 대한 신뢰감은 형성되어 있다. 손흥민(토트넘)을 필두로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PSG), 황희찬(울버햄프턴) 등이 유럽 빅클럽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호평을 끌어낸 덕이다. 일본 선수에 대한 평가도 비슷한데, 브라질을 필두로 한 남미 10대 유망주 영입에 부담이 커지면서 생긴 흐름이기도 하다. 브라질 유망주의 경우 이적료가 500억원 내외에서 출발하는 수준이다. 유럽 스카우트들은 검증된 시스템 속에서 좋은 기량과 태도를 지닌 선수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한국과 일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잉글랜드의 경우 최근 취업비자(워크퍼밋) 규정을 개정했다. A매치 출전 경력이 없는 10대 후반 선수를 영입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17~18세 등 어린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뚜렷해졌다. 최근에는 2006년생 윤도영(대전 하나시티즌)과 강주혁(FC 서울), 2007년생 박승수(수원 삼성)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 스카우트진이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K리그1·2의 각 구단들이 경쟁적으로 10대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늘리기 시작한 것도 이 흐름과 무관치 않다.
김병지 대표이사는 “토트넘이 최근 양민혁과 같은 나이의 잉글랜드(아치 그레이), 스웨덴(루카스 베리발) 유망주를 영입했는데 이적료가 적게는 2배에서 많게는 10배 정도 차이가 났다”라면서 “양민혁이 남긴 이적료가 대단하지만, 한국 유망주의 가치는 향후에 더 올라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에 대한 유럽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이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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