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먹은 가장 비싼 국수는? [박찬일의 ‘칼과 책’]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외 옮김
민음사 펴냄
(제882호 “이걸 먹고 우선 잠을 자둬”에서 이어짐) 괴테는 이탈리아 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훑고 내려가는데, 계절풍에 대한 언급이 몇 번 있다. 특히 ‘시로코’와 ‘트라몬타나’를 섬세하게 겪는다. 당시 이런 계절풍에 관한 깊은 연구는 없었을 것 같다. 괴테는 단신으로 반도의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며 어떤 때는 계절풍의 도움을 받아 온화한 날씨를 얻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일과 다른 날씨에 생경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트라몬타나는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골바람이다.
유럽 지도를 보면, 알프스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 거의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는 좌우로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북부의 왼쪽인 프랑스 경계에서 오른쪽인 밀라노-베네치아 방면으로 달릴 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설산의 장관을 볼 수 있는데 그게 알프스다. 삐죽삐죽 솟은 알프스의 산맥이 높고 길기 때문에 불어 내려오는 계절풍은 몹시 혹독하고 이탈리아의 기후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반면 이탈리아 남부는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을 맞는다. 바로 시로코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온다는 후끈거리고 향신료 냄새 나는 더운 바람. 시칠리아는 로마 본토보다 아프리카가 더 가까운 섬이다. 그래서 시로코의 강력한 영향권에 놓여 있다. 나는 시칠리아에서 요리를 배울 때 이유 없이 아팠다. 시름시름 앓는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그저 일이 힘들고 향수병 때문이겠거니 했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광장에 나가면 온도계가 50℃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운 지역이었지만 더위에 지치지는 않았다. 습하지 않은 날씨 때문이었다. 그 날씨가 바로 쉼 없이, 묵직하게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시로코의 무겁고 건조한 바람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 이 바람은 이방인의 몸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시 쓰는 최갑수와 나중에 다시 시칠리아 기행을 했다. 그 섬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이동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아팠다. 감기 증상도 아니고, 몸살도 아니었다. 잘 먹고 푹 쉬어도 미친 듯이 아팠다.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소화제 같은 온갖 구급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하루는 유럽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한다는 그리스의 신전, 신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아그리젠토를 그와 같이 갔다. 나는 너무도 아파서 몸을 비틀며 신전 입구의 카페에서 쓰러져 있었다. 최갑수만 혼자 그 신전의 숲을 돌고 나왔다. 나는 그때 알았다. 오래전 일할 때 겪었던 고통과 흡사하다는 것을. 최갑수와 비행기를 타고 다음 여정인 북부의 베로나로 올라왔을 때 그 예감은 정확했다. 모든 고통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풍토병은 바람에서 온다!
“진짜 이탈리아 음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기행〉에서 괴테가 음식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북부에서는 산짐승 고기를 먹는다. 유럽에서 비교적 공통된 분위기이긴 한데, 괴테 시절이나 지금이나 산짐승 고기는 귀한 대접을 의미한다. 특히 사냥한 고기라면 고급 식당에서 아주 비싸게 팔린다. 사슴이나 뇌조, 산비둘기를 잡은 포수들이 트럭에 사체를 싣고 고급 식당의 뒷문을 노크한다.
지인이 일하는 베네치아 근처의 한 고급 식당에 가본 적이 있다. 이 식당은 미쉐린에서 별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사냥한 야생 고기 전문식당이었다. 한국인은 이런 식당에서 나오는 메뉴에 익숙하지 못하다. 야생 고기는 특유의 향이 있어서, 한국인은 대체로 그 향을 ‘잡는 데’ 애를 쓴다. 된장을 풀고 향신료를 문지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향을 적당히 살려야 옳다고 생각한다. 야생 비둘기의 냄새를 다 잡아버리면 차라리 값싼 닭고기를 먹는 게 낫지 않으냐며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뒤 한 식당에서 일할 때였다. 어떤 친구가 내게 부주방장급으로 일할 요리사를 소개해줬다. 침착하고 성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요리 솜씨도 아주 좋았다. 다만 이탈리아 요리를 잘 몰라서 새로 다 배워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경기도 동부의 한 위성도시 출신인데, 요리사가 되기 전에는 주먹도 좀 쓰고 그랬다고 했다. 몸이 다부졌다. 그는 성질 고약한 내 부주방장이 되어 온갖 일을 떠맡아 처리했고 후배들도 잘 도닥이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진짜 이탈리아 음식을 배우러 가고 싶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두말 안 하고 ‘오케이’ 했다. 근무시간을 잘라서 어학원에 보냈다. 그는 얼마 뒤 이탈리아로 떠났다. 소식을 전해온 것은 한참 후였다. 그는 미쉐린 원스타를 받은 식당에서 일하며 신임을 얻었고, 밀라노의 투스타, 그리고 베르가모의 스리스타까지 진출했다. 주방장이 가장 신임하는 부주방장급 핵심 셰프로 일했다. 온갖 가짜 이력, 뻥튀기 이력으로 귀국 후 사기를 치는 요리사들이 적지 않은 시기였다. 그의 이력은 진짜였다. 내가 현장에 가서 확인을 했으니까.
그는 서울에 있을 때 마음을 두었던 한 아가씨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귀국 후 결혼했다. 그는 안경석 셰프이고, 굳이 여러분에게 정보를 더 드리자면 이태원에서 ‘월간식당’이라는 독특한 요릿집을 운영한다. 내가 본 요리사 중에 가장 투쟁심이 강했던 친구다.
괴테는 시칠리아를 돌면서 1787년 4월24일 지르젠티(Girgenti·아그리젠토의 옛 이름)라는 마을에 묵는다. 이곳에서 그는 귀중한 음식을 먹는다. 바로 파스타다. 동네에 여관이 없어서 어떤 가정집에 묵게 된다. 거기서 ‘아마도’ 스파게티의 원형이라고 할 파스타 만드는 걸 보고 묘사한다. 원래 스파게티는 이처럼 손으로 밀어서, 한 가닥씩 만드는 국수였다.
“가장 비싼 값을 받는 국수였다. 먼저 (반죽을) 긴 막대기 모양으로 만든 다음 소녀가 가는 손가락을 이용해서 뱀 같은 모양으로 만다. 그라노 포르테라는 질 좋은 밀을 쓴다고 한다. 기계나 주물을 쓰는 것보다 손으로 만들면 훨씬 더 많이 나온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괴테는 음식의 맛을 묘사하는 데 관심이 없다. ‘맛있는 포도주, 만족스러운 식사’ 정도의 묘사가 전부다. 괴테의 생존 시대는 프랑스 궁정에서 앙투안 카렘(1784~1833)이 온갖 화려한 미식의 연금술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일부 겹치는데도 말이다. 역시 그는 ‘독일인’이었던 것 같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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