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여름과일 포도시장 삼국지
여름과일 포도의 세대교체가 거셉니다. 전통적으로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강자였던 적색 포도 캠벨이 ‘귀족 포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연녹색 포도 샤인머스캣에 그 왕좌를 빼앗기고 있는데요. 심지어 캠벨의 대체재로 강력한 경쟁력을 보였던 거봉조차 샤인머스캣에 밀리며 국내 포도 시장 3파전에서 샤인머스캣이 한참 앞서있는 모양새입니다. 씨가 없고 당도가 높은데다 사이즈도 큼지막해 포도계의 명품을 자처하는 샤인머스캣이 본격적으로 소개된건 불과 5년전인 2019년. 국내 생산량 급증으로 가격이 싸진 샤인머스캣은 오히려 지금은 싼값에 팔리고 있습니다. 다만 그 맛은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긴 합니다.
샤인머스캣의 방심은 캠벨에겐 기회가 됐습니다. 최근 대형유통사 조사에 따르면 이번 여름 포도 매출액에서 캠벨이 차지하는 비중이 3년만에 30%대를 회복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여전히 샤인머스캣의 매출 점유율은 50.6%로 압도적 1위지만 과연 캠벨의 복수혈전이 성공할지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갑자기 왜 포도종자간 경쟁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하시죠. 바로 과거의 영광을 품은 캠벨이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이번 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오하이오에서 성장한 농업인의 꿈
캠벨 포도의 정확한 명칭은 캠벨 얼리(Campbell early)입니다. 그리고 아시아 시장에서 포도의 대명사격인 해당 품종을 개발한 인물은 바로 조지 W. 캠벨입니다.
조지 캠벨은 1817년 1월 12일 뉴욕주에서 데이비드 캠벨과 메리 존스 토드 캠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821년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주 샌더스키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캠벨은 샌더스키로 이사오며 ‘샌더스키 클라리온’이란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클라리온은 해당 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입니다. 당시 인구가 300여명에 불과했던 샌더스키에서 그는 유명인이었고 1828년 오하이오 상원의원으로 선출돼 2년간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식인층의 자녀로 태어난 캠벨은 어릴적부터 다양한 공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농업이었습니다.
오하이오주는 당시 농업이 발달한 지역 중 하나였는데요. 이 곳 오하이오에서는 다양한 과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캠벨이 어릴 적부터 농업에 대한 깊은 관심을 키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어찌 보면 캠벨 가족의 이사가 캠벨 포도의 탄생을 만든 나비효과가 된 셈입니다.
특히 과일을 기르는 과수 재배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청년 캠벨은 각종 과일들을 키워보며 전문성을 키워갔습니다. 포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습니다.
청년이 된 그는 아버지를 도와 신문 발행과 출판 사업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농업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샌더스키 클라리온은 1841년 그의 은퇴와 함께 다른 전문경영인들에 인수돼 샌더스키 레지스터로 재탄생합니다. 해당 언론사는 지금도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아버지의 은퇴, 델라웨어로 향한 캠벨
아버지의 은퇴로 캠벨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1849년 오하이오주 델라웨어로 이사를 하며 새로운 기회를 맞이합니다.
포도를 좀 좋아하시는 분은 이 델라웨어가 익숙하실 텐데요. 포도의 대표 품종 중 하나인 델라웨어가 바로 이곳 델라웨어라는 도시에서 기인했기 때문입니다. 오하이오주의 델라웨어라는 도시는, 미국의 50개 주 중에 하나인 델라웨어 주와는 또 다른 도시라는 점도 함께 점검해두시고요.
델라웨어 포도는 1851년 뉴저지 주 프렌치타운에서 우연히 발견된 포도 품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1855년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지역의 에이브럼 톰슨이란 전문 육종가에 의해 대중 인지도가 쌓였는데요. 미국 품종이라 분류되지만 정확히 그 모계 포도종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잡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문헌에 따르면 톰슨이 미국계 포도 라브라스카와 아에스타발리스의 교배종에 유럽계 포도를 교배해 만든 종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기원이 어찌 됐든 델라웨어 포도는 델라웨어 출신의 톰슨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이름난 포도로 명성을 크게 얻게 됐고 국내서도 3월부터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포도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델라웨어는 생산이 쉽고 탁월한 풍미와 품질로 미국을 대표하는 포도 품종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또한 그 유명세 덕에 ‘델라웨어 펀치’라는 소다 음료로도 제작돼 판매될 만큼 인지도가 높은 포도입니다.
델라웨어 홍보대사, 직접 포도개발에 나서다
다시 캠벨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캠벨은 이 곳 델라웨어의 포도를 접하며 포도의 매력에 흠뻑 젖어 듭니다. 델라웨어 포도 홍보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역 포도를 알리는데 애썼다고 하는데요. 거기다 좀 더 욕심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직접 포도종을 개발해보고 싶었던 것인데요. 캠벨은 미국종 포도와 유럽종 포도를 이래저래 교잡하며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 원예 협회장을 지내는 등 외부 활동에도 활발한 인플루언셔였는데요.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에 의해 1878년 파리 박람회에 미국 대표위원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의 꿈이 결실을 본 시기는 1892년. 그 연구의 결과물이 바로 캠벨 얼리라는 품종인데요. 무어스 다이아몬드 품종과 얼리 콘코드 품종을 교배해서 캠벨 포도가 탄생했습니다. 캠벨은 자신의 이름과 포도 품종의 명칭을 합친 ‘캠벨 얼리’라고 명명합니다. 그의 나이 무려 75세의 나이에 탄생한 인고의 작품이었습니다.
캠벨 포도는 중간 사이즈의 크기에 검붉은 포도로 당도와 산도가 균형 잡힌 식용 포도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또 병충해에 강하고 추위에 잘 견디기 때문에 미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과 같은 4계절이 뚜렷한 아시아 국가에서도 쉽게 재배될 수 있었습니다.
캠벨은 자신의 이름을 포도 품종에 남긴 후 6년뒤인 1898년 델라웨어 카운티에서 숨을 거둡니다. 포도에 대한 캠벨의 애정은 1854년 그가 이 곳 델라웨어 카운티에 지은 집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는 집 마당 한켠에 델라웨어 포도를 기르는 포도원을 갖고 있었고 다른 한켠에선 다양한 과일을 개발하고 개량한 연구실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포도 남긴 캠벨
사후 그의 집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기증된 후 2002년 델라웨어 카운티 문화예술센터로 재탄생했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포도업계에 그가 미친 영향력과 성과, 그리고 업적을 기리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비록 명품 포도, 샤인머스캣의 등장으로 100년 넘게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왔던 캠벨의 시대는 져버렸지만 구관이 명관. 아마 언젠가는 캠벨의 시대가 또 다시 오지 않을까요. 다가오는 올해 추석 성묘상에는 전통의 강호 캠벨이 오를지, 신흥 강자 샤인머스캣이 오를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