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성폭행 피해자에 “너는 뻔뻔한 X”... 악다구니 쓰며 인격살인 한 사람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8. 3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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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78] “오늘 밤 당신의 침대에서 자도 될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 남루한 차림의 여성이 군인 장교의 방문을 두들깁니다. 도시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서른이 안 되어 보이는 여성의 동공은 위태로이 흔들립니다.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에게 쫓기는 모습이지요. 장교는 동정심이 일면서도, 동시에 오늘밤에 있을 쾌락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모두가 상상하다시피, 그 여성은 장교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동료 군인들은 “장교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면서 낄낄 댔지요. 도시의 여성들은 부러운 눈빛을 보냈고, 남성들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봤습니다.

자발적이되, 역설적으로 강요된 선택이었습니다. 도시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집단 강간’이 벌어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소련이 점령한 베를린에서였습니다. 소련의 군인들은 독일 여성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성욕 해소를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소련군의 베를린 집단 강간을 다룬 영화 ‘베를린의 여인’ 중 한 장면. [사진출처=IMDB]
독일 여성 한 명을 소련 군인 23명이 줄서서 강간했을 정도였습니다. 사는 방법은 단 하나. 간부급 군인의 애인이 되는 것. 매일 밤 그의 성욕을 해결해주고, 식량도 얻어서 돌아갑니다. 다른 군인들은 간부의 애인을 건드릴 수 없었지요. 집단강간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한명에게만 강간당하기로 한 선택이었습니다.

1945년 5월은 연합군의 승리가 가시화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역사서는 이날을 인류의 승리로 기록하지만 누군가에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베를린에서 끔찍한 강간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서였습니다. 그날의 베를린을 돌아봅니다. 절대로 ‘전범국’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가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 군인들.
베를린 전쟁의 민낯을 보다
“베를린이 처음 전쟁의 민낯을 목격한 날.”

1945년 4월 30일, 한 사내가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자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소련군이 히틀러 관저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전쟁은 끝나는 듯 보였으나, 베를린에서는 새로운 지옥도가 열렸습니다. 소련군의 지독한 보복전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은 전쟁의 참상을 그제서야 처음 목도합니다. 1939년 9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지 5년이 지난 뒤에서였습니다.

“베를린이 함락됐다.” 소련군이 도시에 소련국기를 걸고 있다.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보복은 가장 약한 고리, 여성을 향했습니다. 집단 강간이 수시로, 주기적으로 벌어집니다. 고되고 고된 전쟁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마치 전리품을 취하듯이 그들은 여성을 수시로 범했습니다.

나이도 가리지 않았지요. 딸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까지. 길거리에 보이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표적이 되었습니다. 매일 밤 술에 취한 소련 병사들의 ‘사냥 시간’의 반복.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베를린에는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소련 본부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독일 사령관.
강간에 노출된 베를린 여성들의 선택
“여기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인간이 지옥에서 적응할 때, 비극은 견디기 힘든 참극이 됩니다. 매일밤 이어지는 강간에 여성들은 제 살 도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무기력한 독일 남성에게는 더 이상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높은 계급의 소련 군인에게 정기적으로 몸을 바치는 방법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애인행세를 함으로써 야수들의 눈을 피했던 것이지요.

“먹을 것을 구해야해... ”소련군 사이를 걷고 있는 독일 여성. ‘베를린의 여인’ 한 장면. [사진출처=IMDB]
베를린에 식량 위기가 닥치면서 여성의 위기는 한층 더해졌습니다. 어차피 강간을 당할 바에 음식이라도 구하자는 마음으로 매춘을 택하는 여성도 많아졌지요. 매춘이라는 이름의 강간이 횡행했던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를린 여성 10만명이 강간당했으며, 이 중 1만명이 죽어버렸다. 대부분 자살이었다.” 독일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피해자는 200만명으로 늘어납니다. 역사학자 안토니 비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큐모의 집단 강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소련 당국이 이같은 행위에 대해 본격적인 규제를 시작한 건 베를린이 점령당한 지 3개월이 지난 8월 3일이었습니다. 수 만명의 육체와 영혼이 넝마가 되어버린 뒤였지요. 미국·프랑스 등 다른 연합군에 의한 피해도 종종 보고가 되었지만 소련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보호해주실 수 있나요?”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강간을 복수라 생각한 소련
“소련은 유대인의 음모가 만든 체제다.”

소련이 독일 민간인에게 대대적인 인권 유린을 행한 배경에는 보복심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역시 소련을 침공하면서 집단 강간을 비롯한 대학살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한 독일 여성을 강간하려고 한 소련 군인을 장교가 제지하자, 그 병사는 반문합니다. “독일 놈들이 우리 여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습니까?”

독일이 소련에게 행한 끔찍한 짓을 소련군은 기억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침공 소식을 들은 소련 시민들.
이 병사의 말처럼, 나치 독일이 소련에서 벌인 일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독일 나치정권은 당초부터 소련의 공산화가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육군 사령관 칼 하인리히 폰 슈툴프나겔은 소련군 위원들을 두고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됐다”고 했을 정도였지요.

아시다시피 독일은 대표적 유대인 혐오 국가. 소련을 공격했을 때, 독일은 다른 국가에서 보다 더욱 공격적이었고, 더욱 야만적이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고, 여성과 아이들도 학살의 대상에 포함됐지요. 몸이 칼로 난자당한 여성의 시체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인권 유린이 자행되면서도 독일 장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유대인-볼세비키(소련 집권 정당) 체제를 근절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저항군 소속 간호사를 교수형에 처하려는 독일군.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나치가 행한 1000만건의 강간
“나치는 조직적으로 강간을 정복의 무기로 삼았다.”

폴란드, 소련 등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일반 군인들은 점령지 여성들에게 죄책감 없이 손을 댔습니다. 장교를 위한 윤락 시설을 만들고 소련과 폴란드 여성을 강제로 밀어넣었지요. 강간으로 임신한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장소도 동부전선이었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당당하게 외치곤 했었지요. “너희들은 우리 히틀러 군대를 위한 창녀.”

1940년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프랑스 지방 도시의 유대교 회당을 매춘굴로 만들어 군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언론인이자 작가로 이 주제를 연구한 수잔 브라운 밀러는 “유대인, 러시아인, 폴란드인과 같이 나치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목표에서 강간을 사용했다”고 지적합니다. 독일의 여성인권 운동가인 우르술라 셸레는 소련에서 나치에 의한 강간이 약 1000만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때 태어난 사생아만 해도 100만명에 달합니다.

프랑스나 벨기에 등 서부 전선에서도 끔찍한 범죄가 잇따랐지만 동부전선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인종 학살의 관점에서 집단 강간이 이뤄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 군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조국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범죄라는 사실 앞에서 ‘도덕’이라는 눈을 감아버렸던 것이지요.

소련군 포로를 바라보고 있는 독일 군사 지도자 히믈러.
입을 닫아야 했던 독일 여성들
“너희는 뻔뻔한 년이 됐어, 도덕 규범을 다 잃어버린 년들 같으니라고.”

소련의 점령도 점차 안정화가 될 무렵. 포로로 잡혀간 독일 남성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들을 마주한 건 강간당한 처와 자식이었습니다. 어린애처럼 울부짖는 남편, 강간당한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한 젊은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여성을 비난하는 가족들까지. 한 독일 여성은 남편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연합군 병사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일 비밀로 지켜야 할까”. ‘베를린의 여인’ 중. [사진출처=IMDB]
어떤 남성들은 도시를 지킨 여성들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소련군 창녀야” 끔찍한 강간을 견딘 그녀들은 다시 한번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베를린의 여성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니 강요당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전범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내부적으로는 연합군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누구도 인권의 측면으로 바라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의 국민들이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말하는 건 사실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도시도, 사람도 모든 걸 파괴한 끔찍한 전쟁이었다. 1945년 독일 베를린 포츠담 광장.
세계가 냉전에 접어들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독은 우방국 소련의 만행을 들출 수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세계에서 소련은 ‘해방군’이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서유럽 역시 연합군의 만행을 고발할만큼 진실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언제나 베를린의 여성들은 ‘잘못된 피해자(wrong victims)’였습니다.
50년이 지나서야...피해자들이 입을 열었다
당시 베를린에 남아있던 한 여성의 일기가 1954년 발간됐지만 주목을 받지 못한 배경이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이 되어서야 ’Eine Frau in Berlin’(베를린의 한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 되었습니다. 인권의 측면에서 베를린의 여성들을 바라볼 수 있게된 뒤였습니다.
베를린 함락 당시 집단 강간을 기록한 마르타 힐러. 그녀의 일기는 익명으로 출간됐다가 그녀가 죽은지 2년 되인 2003년 다시 출간돼 주목을 받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여성의 세계에서 ‘승전’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날’이라는 팡파레 소리에, 여성의 비명이 묻힌 것은 아니었는지. 역사의 기록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승자의 역사만 혹은 남성의 기록만 주목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전쟁에 승전국은 없다. 끔찍한 인권침해만이 있을 뿐이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전쟁터와 다름 없었다. ‘베를린의 여인’ 한 장면. [사진출처=IMDB]
<네줄요약>

ㅇ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한 1945년 5월 베를린에서는 끔찍한 집단 강간이 일어났다.

ㅇ나치 독일이 소련에게 행한 만행을 보복한다는 이유에서였다.

ㅇ베를린 여성의 피해는 종전 이후에도 정치적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ㅇ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ㅇ앤터니 비버, 베를린 함락 1945, 글항아리, 2023년

ㅇ익명,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마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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