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 국가’ 외치던 공무원의 사망…‘경로 이탈’ 속수무책 권익위
“위원장·부위원장, 모두 대통령 측근…임명 제도 손질해야”
(시사저널=이혜영 기자)
반부패 총괄 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240만 공직자와 정부, 공공기관의 표상이자 국민 권익을 위한 첨병을 약속하며 출범한 권익위는 지금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공직자 배우자를 통한 부정청탁의 지평을 열어줬다'는 따가운 비판 속에 고위직 사망과 부적절한 홍보물 논란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전문가들은 20년 넘는 경력을 지닌 부패 방지 전문가의 안타까운 죽음에는 권익위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확보해 달라는 절규가 스며 있다고 본다. 현재와 같은 권력 밀착형 수뇌부 인사로는 정권을 막론하고 불투명한 의사결정이 반복될 수밖에 없고, 외압 의혹 역시 떨쳐낼 수 없다는 경고다.
선물, 이렇게 받아라?…"권익위 왜 존재하나"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사건 종결로 논란의 중심에 선 권익위가 또다시 뭇매를 맞는 모양새다. 이번엔 8월21일 홈페이지에 게시된 '2024 추석 명절 청탁금지법 바로알기' 카드뉴스가 도화선이 됐다.
카드뉴스 첫 번째 장에는 '누구든지 친구, 친지 등 공직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는 명절 선물은 금액 제한 없이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적혔다. 다음 장에는 '직무와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는 100만원까지 선물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직무 관련 공직자에게는 원활한 직무수행과 사교, 의례 목적으로 5만원까지 선물을 줄 수 있으며, 상품권은 특정한 물품 또는 용역 수량이 기재된 것만 해당한다고 안내했다. 이와 함께 8월27일 시행령 개정으로 직무 관련 공직자와 함께하는 음식물 가액이 기존 3만원에서 5만원으로 상향된다는 점, 2024년 추석 명절 농수산물·농수산가공품 관련 상품권 선물을 30만원까지 제공할 수 있는 기간은 8월30일부터 9월22일까지(30일간)라는 점도 공지했다.
곧바로 '가짜뉴스 논란'이 일었다. '뇌물 수령 안내서'에 가까운 내용을 권익위가 제작했을 리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해당 제작물이 권익위의 공식 콘텐츠로 확인되자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김건희 여사의 300만원 상당 명품가방 수수는 청탁금지법상 배우자 처벌 조항이 없고, 윤석열 대통령과의 직무 관련성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결 처분한 점을 방어하고 있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공직자에 100만원 선물을 권하는 권익위" "거대한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99만원 공무원용 선물세트라도 만들어야 할 판" 등 냉소 섞인 평가가 뒤따랐다.
박중배 전국공무원노조 대변인은 "청탁금지법에 따라 소방직은 커피나 음료수 한 잔도, 교사는 제자들로부터 카네이션 한 송이조차 못 받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최근 권익위의 행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이 정도는 괜찮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공무원, 특히 고위직에게 선물을 주라고 권장하는 느낌마저 든다. 공무원과 직간접적으로 업무 관련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뭐라도 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권익위는 명절 때마다 청탁금지법 안내용 카드뉴스를 게시하고 있으며 문의가 많은 내용을 중점적으로 명시해 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권익위는 2020년부터 해마다 추석과 설이 되면 청탁금지법을 안내하는 카드뉴스를 제작해 왔다. 권익위 관계자는 "카드뉴스 내용 자체는 예년과 큰 차이가 없고, 안내 사항이 청탁금지법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직사회 안팎의 진단은 다르다. 권익위가 '예년과 동일하게'라는 판단을 한 것 자체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김 여사 사건 종결 처리 후폭풍을 감안하면 최소한 권익위 차원에서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은 차단했어야 하는데, 이런 판단과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패 방지 정책 추진 동력을 잃어가는 권익위의 현주소를 그대로 노출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익위는 권력을 견제·감시하며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기관인데 '이런 경우가 아니면 선물을 줘도 된다'는 식의 접근은 부적절하다"며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공직사회의 엄격성과 청결성을 담보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한 교수는 "'내용에 문제는 없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다'는 해명대로라면 권익위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며 "부패 방지와 권력으로부터 피해받은 국민을 구제하는 행정심판 역할을 하는 게 권익위 주요 기능인데 반부패 역할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최대 뇌관으로 꼽히던 김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사건을 올해 6월, 175일 만에 종결 처리했지만 권익위는 더 큰 소용돌이에 갇혔다. 김 여사 사건을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고 종결한 것과 그 과정, 발표 시기와 방식까지 논란의 연속이다. 여기에 8월9일 김 여사의 청탁금지법 위반 여부 관련 조사 실무를 총괄해온 김아무개 부패방지국장(직무대리)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권익위를 향한 비난 수위는 한층 더 거세졌다.
고위 공무원 극단 선택, 그 곁엔 '권력 그림자'
국가청렴위원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김 국장은 2008년 통합 출범한 권익위에서 반부패 업무를 담당해 왔다. 고인은 영국 유학을 다녀온 후 반부패 정책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등 20년 넘게 현장에서 활동한 이 분야 전문가로 통한다. 김 여사 사건 역시 시작부터 종결까지 김 국장이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 국장의 상사인 정승윤·김태규·박종민 부위원장 3인이 법리 검토와 처리를 주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 국장은 김 여사 사건을 권익위 차원에서 그대로 종결해서는 안 되며 수사기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6월10일 15명이 참여한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종결(9표), 이첩(3표), 송부(3표) 결과가 나왔고, 이는 곧장 정 부위원장의 72초 기습 브리핑을 통한 '종결 처리' 결과 발표로 이어졌다. '여사 권익위' '300만원 엿 선물도 괜찮나' 등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8월26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김 국장 사망에 대한 새로운 의혹도 불거졌다.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고인이 숨지기 하루 전인 8월8일 저녁 권익위 운영지원 과장과 인사계장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좌천성 인사'가 예고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유철환 권익위원장은 "(고인에 대한) 인사 계획은 없었다"며, 김 국장이 생전에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국회의 쏟아지는 자료 요구와 압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입장을 내놨다. 전원위원회 참석 대상이 아닌 김 국장에게 외압을 행사할 이유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권익위의 '판정'을 기다리는 수많은 안건과 비교해 담당 국장의 사망으로까지 이어진 이번 사건은 오히려 사실 관계가 분명하다. 명품가방을 전달한 인물과 받은 사람이 명확하고,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도 전 국민에게 공개됐다. 준 쪽은 청탁 목적이 있었다고, 받은 쪽은 박절하지 못해 보관해온 것이라고 입장이 엇갈릴 뿐이다.
전문가들은 권익위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가로막는 커다란 구멍에 첫 단추가 잘못 꿰이면서 국가적 청렴·반부패 정책 전반이 뒤흔들리게 됐다고 지적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서 모두 대통령 측근이나 전문성 없는 여권 인사가 기용되고 있는 점을 여야가 엄중히 되돌아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움직이는 행태 반복"
윤석열 정부의 초대 권익위 수장에는 특수통 검사 출신으로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정치공작진상특별위원장을 지낸 김홍일 위원장이 올랐다. 김 위원장은 임명 5개월 만에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판사 출신인 유철환 위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유 위원장은 윤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로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에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한 이력이 있다.
'친윤' 국민권익위원장이 잇달아 임명된 데 이어 부위원장도 모두 '윤 라인'으로 꾸려졌다. 정승윤(전직 검사)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은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후배로, 대선 당시 윤석열 캠프에서 사법개혁 공약 실무 등을 담당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박종민(전직 판사) 부위원장 역시 윤 후보 선대본에서 법치행정혁신본부장을 맡은 바 있다.
김 여사 사건 종결 후 자리를 옮겨 현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김태규(전직 판사) 전 권익위 부위원장은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모두 김 여사 명품가방 수수 사건의 피신고자인 윤 대통령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셈이다. 이해충돌방지법에 따르면 이들은 김 여사와 윤 대통령 사건 처리 및 결정을 회피했어야 한다. 그러나 유 위원장과 정 부위원장 등은 그대로 전원회의에 참석했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치도 전무했다.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은 권익위가 처해 있는 현 상황에 참담함을 드러냈다. 이 이사장은 1992년 당시 중위 신분으로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을 폭로한 인물이다. 김 국장이 운명을 달리하기 며칠 전 "권익위 수뇌부가 내 생각과 다르게 종결 처분을 밀어붙였다. 힘들다"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문자를 보낸 상대방도 바로 이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은 "권익위원장이나 부위원장을 대통령이나 권력에 보은하고 충성하려는 인물들로 임명하고, 이들의 입맛에 맞는 결론을 도출하도록 압박하는 구조에서 공무원들은 사지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며 "권익위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 고인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공천을 못 받거나 낙선한 친정부 인사, 대선 캠프에서 활약한 최측근을 위원장이나 부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전례는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정작 여당일 때는 권익위의 독립성,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논의와 고민을 하지 않다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움직이는 행태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정치권을 향해 쓴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위원장과 부위원장 임기가 3년임을 고려해 직전 3년 내 선출직 예비후보 등록이나 출마 이력이 있는 경우 또는 대선 캠프에서 직책을 맡은 경우는 배제하고, 장관급인 위원장은 국회 청문회를 거치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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