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무당파와 경합주 넘고 백악관 입성할까
2024년 8월22일 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대선 후보 수락연설을 끝으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막을 내렸다. 민주·공화 양당 모두 진용을 갖추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불과 한 달여 만에 판세를 뒤집은 해리스 부통령은 끝까지 우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 조 바이든 대통령의 출마 포기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까? 9월10일로 예정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가 첫 번째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 뒤집은 해리스 바람의 정체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를 촉발했던 1차 대선 토론(6월27일) 직후 실시된 전국 단위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48%)은 바이든 대통령을 5%포인트 차이로 앞서 나갔다. 총격을 당한 귓가에 붕대를 덧대고 나선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선 ‘환희의 찬가’가 넘쳐났다. 하지만 전당대회 폐막 사흘 뒤인 7월21일 바이든 대통령이 출마 포기 뜻을 밝히고,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삽시간에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했다. 그가 사실상 후보로 확정되면서 숨죽이던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월5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의 지지율은 47%로 동률을 이뤘다. 이어 민주당 전당대회 폐막날인 8월22일치 여론조사에선 해리스 부통령(49%)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2%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올해 미국 대선은 11월5일 실시된다. 남은 기간은 두 달 남짓, 정치판에선 제법 긴 기간이다. 더구나 판세도 오차범위 안에서 박빙이다. 어느 한쪽이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거나 과거 스캔들이라도 불거지면 판세는 쉽게 뒤집힐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해리스 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 견줘 유리한 측면은 거의 없다.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해리스 부통령은 2020년 대선 때 민주당 경선 주자로 나섰다가 미미한 지지율 속에 중도 하차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백악관에 입성한 뒤에도 그는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이런 탓에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더라도, 그의 퇴임 뒤 치러질 2028년 대선에서마저 해리스 부통령은 ‘유력 후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8월23일치에서 민주당 의회 보좌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해리스 부통령한테 자신이 누구인지, 집권하면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했다. ‘나는 도널드 트럼프도, 조 바이든도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게 해리스 부통령이 해야 할 전부다.”
해리스 부통령은 ‘바이든 대 트럼프’ 재대결 구도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에게 신선한 대안으로 다가왔다. 노쇠한 바이든 대통령도 싫고, 심술만 부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도 싫었던 개혁 성향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바람’은, 일단 거기까지다. 민주당 계열 정치 컨설팅 업체 ‘내비게이터 리서치’가 8월20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 무당파 유권자층에선 해리스 부통령의 지지율(34%)이 트럼프 전 대통령(43%)보다 크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입장에선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8월27일 해리스 부통령 앞에 놓인 ‘5대 장애물’을 이렇게 짚었다.
트럼프도 바이든도 아닌
첫째, 미국 대선 결과를 좌우할 7대 격전지(스윙스테이트) 판세가 지나치게 박빙이다.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보도되는 여론조사 결과가 자체 조사와 달리 지나치게 장밋빛”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8월19일)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직후 해리스 부통령이 바람을 탈 수 있었던 건 비백인 청년층 유권자의 열광적인 지지 덕분이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이전까지 민주당이 사실상 방치했던 격전지 네바다와 애리조나,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서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정치 전문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집계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네바다(46.0% 대 47.7%)와 애리조나(46.8% 대 47.3%), 조지아(47.1% 대 48.1%)와 노스캐롤라이나(46.3% 대 47.2%)에서 모두 간발의 차이로 뒤지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에서도 47.5% 대 47.7%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위다. 해리스 부통령은 격전지 중 위스콘신(48.6% 대 47.6%)과 미시간(48.5% 대 46.5%) 2곳에서만 트럼프 전 대통령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위험 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둘째, 해리스 부통령은 대선 출마 확정 이후 지금까지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다. 시엔엔(CNN) 방송과 8월27일 첫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팀 월즈 부통령 후보(미네소타 주지사)와 함께 한단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은 이미 “능력 없는 게 드러날까봐 인터뷰를 피하는 것”이란 비난을 시작했다. 단독 인터뷰가 늦어질수록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익명의 민주당 관계자는 폴리티코에 “해리스 부통령은 과거 단독 인터뷰 때 민감한 질문에 지나치게 논쟁적으로 대응해 문제가 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돌발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대선 후보 토론회도 만만찮다. 공판검사 출신 해리스 부통령은 ‘논변의 달인’이지만, 검사와 토론자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더구나 ‘막말의 달인’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6월 첫 대선 토론회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낙마’를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9월10일로 예정된 에이비시(ABC) 방송 주최 토론회를 앞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은 “(한쪽이 말할 때 상대방 마이크는 끄기로 한) 기존 합의가 준수돼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 쪽은 “새로운 토론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세적으로 보인다. 2016년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대선 토론을 압도했지만, 선거 결과는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승리였다.
무당파 유권자에선 트럼프에 뒤져
넷째, 구체적인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물론 바이든 대통령과의 차별화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대선에 긴급 투입된 탓에 자신만의 정책을 만들어낼 시간이 없었다. 실제 8월22일 전당대회 수락연설에서도 해리스 부통령은 민주당의 전통적 노선을 강조했을 뿐 새로운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연설은 화려했지만, 내용은 밋밋했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공화당 쪽에선 벌써부터 “무공약, 말 바꾸기”를 해리스 부통령 공격의 초점으로 삼고 나섰다.
다섯째, 백인 남성 유권자층의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세가 꺾일 줄 모른다. 해리스 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 사퇴 이후 망설이던 청년, 여성, 소수 인종 유권자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전국단위 여론조사는 물론 특히 격전지에서 백인 남성 유권자의 표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 유권자층이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기를 ‘좋았던 옛날’로 기억하고 있어서다. 실제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매달 실시하는 국정 만족도 조사를 보면,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후보를 사퇴한 2024년 7월 ‘만족한다’는 응답은 18%에 그친 반면 ‘불만족한다’는 응답은 80%에 달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 시절 코로나19 창궐 직전인 2020년 2월엔 ‘만족’이 45%, ‘불만족’이 55%였다. ‘만족한다’는 답변이 20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때다. 사실 여부를 떠나, ‘확신’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2024년 미국 대선은 미국이란 나라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충돌하는 각축전이라 할 만하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 것은 민주·공화 양당 부통령 후보의 전당대회 수락연설이었다. 제이디(J.D.) 밴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는 7월18일 연설에서 “미국을 ‘이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미국은 법치와 종교적 자유란 이상에 기반해 세워졌다”며 “하지만 미국은 그저 이상만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 역사와 미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미국을 유럽 각국처럼 ‘국민국가’로 규정하고, “미국민은 공통의 언어(영어)와 종교(기독교), 가족관(이성 부모와 자녀)을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이민자 역시 이러한 미국의 ‘주류 문화’를 수용해야 ‘미국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 선거 너머 ‘가치 전쟁’
팀 월즈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전혀 다른 주장을 내놨다. 그는 8월21일 수락연설에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선 (밴스 후보가 강조한 이른바 ‘주류 문화’ 수용이 아닌) 미국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집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이성애자든 아니든, 자녀가 있든 없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밴스 후보가 트럼프 전 대통령 등장 이후 갈수록 극단화하는 미국 보수주의의 충실한 대변자인 반면, 월즈 후보는 다양성을 근본으로 삼는 전통적 진보주의의 상징이라고 평가한다. 두 개의 이념이 정면충돌하는 ‘가치 전쟁’이 본격화할 모양새다.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전략도 여기에 맞춰질 공산이 커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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