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해병 특검’ 딜레마에 빠진 한동훈과 ‘1994년 이회창 모델’ [최병천의 인사이트]
(시사저널=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당정 협의 과정에서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를 제안했다. 한 대표의 제안은 용산 대통령실에 의해 곧바로 거부됐다. 거부 입장이 알려진 이후 한 대표는 재차 페이스북에 "의료 개혁의 본질과 동력을 유지하되, 국민 건강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덜어드리기 위해 해결책이 필요합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대통령실과의 의견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언론은 다시 '윤한 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입장이다. 이 대표는 8월28일 최고위 회의에서 "한 대표가 의대 증원을 유예하자고 한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 의료 붕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발언했다.
이재명의 윤석열-한동훈 갈라치기
이 대표는 왜 한 대표 입장에 동조했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다. 먼저 한 대표 제안이 실제로 설득력이 있다. 의대생은 1년에 약 3000명을 뽑는다. 2025학년부터 추가로 약 1500명을 더 뽑는다. 즉, 4500명을 뽑는다. 문제는 2024학년 의대생 3000명이 유급 처리됐다는 점이다. 그럼 2025학년 의대 관련 학생 숫자는 신입생 4500명과 유급된 3000명이 포함된 합계 7500명이다. 현행 의대생 교육 시스템은 3000명에 맞춰져 있다. 교수를 추가로 뽑은 것도 아니고, 실습 공간이 더 확보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년부터 7500명의 의대생 교육을 해야 한다. 당연히 현장에서는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대표가 한 대표 주장에 동조한 다른 이유는 정치적 실익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권의 갈등'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 여권 갈등을 키우면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둘 다 타격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이 대표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갈등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8번의 대선에 출마했던 후보자들은 모두 '전임 대통령과 차별화'를 했다. 한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배신자 프레임'과 김건희 여사의 '문자 읽씹 논란'으로 공격받았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실과 사이가 나쁜 것은 분명 약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는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과 '차별화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전임 대통령과 차별화하되, 전임 대통령이 적극적 협조 혹은 묵인해 주는 경우다. 대표 사례는 4개다. 대선후보를 기준으로 볼 때 ①전두환-노태우 ②노태우-김영삼 ③김대중-노무현 ④이명박-박근혜 사례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노태우 후보에게 제공해 줬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을 대선후보로 밀어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전 의원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해 주고, 국민참여경선 방식을 측면 지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반MB 노선'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묵인해 줬다. 모두 전임 대통령의 협조가 큰 도움이 된 경우다.
한 대표도 차별화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협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 대표는 '원내 세력'도 취약하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한 대표는 채 해병 사건에 대한 '제3자 특검'을 약속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발의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친윤계의 저항은 강하고, 원내 기반은 약하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임 대통령의 지원, 원내 세력의 존재라는 기준으로 국민의힘 계열 정당의 대선후보를 정리해 보면 [표]와 같다.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박근혜 후보는 전임 대통령과 차별화하되, 전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았다. 각자 독자적인 원내 세력도 상당했다. 유일한 예외는 이회창 후보 사례다. 한동훈 대표 처지와 상대적으로 근접한 경우는 '1994년 이회창 국무총리 사례'다.
'1994년 이회창 국무총리 사례'를 알기 위해서는 전사(前史)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회창은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한다. 당시까지 선관위는 '개표 관리'만 했다. 이회창 선관위원장은 '선거 감시'에까지 나섰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노태우 민주정의당 총재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부당한 선거 개입을 경고했다. 결국 이 일로 물러나게 됐다. 그는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1993년 2월 감사원장이 됐다. 기존과 달리 최고 권력기관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다. 청와대 비서실,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 국가안전기획부를 감사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서면조사를 했다. 이회창 감사원장의 '강직함'이 회자되는 계기가 됐다.
이회창은 1993년 12월 국무총리가 됐다. 한국의 국무총리 제도는 '대통령 방탄용'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회창 총리는 '헌법상 부여된' 총리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총리를 제외하고 회의를 개최하는 일이 벌어진다. '총리 승인'을 받지 않은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김영삼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결국 1994년 4월에 물러나게 된다. 사퇴하면서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는 말을 남겼다. 국민적 인지도와 인기가 확 올라갔던 계기다.
4개월 만에 총리직 물러났지만 대선후보로
이회창 총리의 총 임기는 4개월이었다. 그러나 아주 강한 국민적 인상을 남겼다. 현직 대통령의 지원도 없었다. 원내 세력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민적 인지도'와 '대의명분' 두 가지를 얻게 됐다.
1996년 4월 총선이 다가오자 이회창 전 총리는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초빙된다. 4월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선후보가 된다. 결과적으로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패배한다.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의 탈당과 독자 출마, 아들 병역비리 의혹, 1997년 11월 외환위기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DJP연합이 맞물렸다. 그러나 1993년 감사원장부터 1996년 총선 선대위원장까지 그의 활동은 '개혁 보수'를 상징했다.
의대 증원 유예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동훈 대표의 '정치력'이 확인되는 더 중요한 무대는 제3자 방식의 채 해병 특검 추진이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과 담판을 벌어야 한다. '1994년 이회창 모델'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면 최상급이다. 그러나 가끔은 싸우고 패배하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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