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어디에나 있다, ‘나의 자리’에서 숨 쉬는 여성들

한겨레 2024. 8. 3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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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빅토리
여고생 응원부 ‘밀레니엄 걸즈’
춤에 대한 열정, 치어리딩팀 결성
탈정치적 여성 ‘써니’ 한계 극복
㈜마인드마크 제공

1999년 거제도의 한 오락실 앞. 펌프 위에서 두명의 남고생이 기량을 뽐내고 있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끝나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박수를 친다. “거제 촌놈들, 뭐 귀신이라도 봤나. 부산서 이 정도는…(일도 아이지).” 거들먹거리며 스코어를 확인한 도시 청년들은 그러나 당황한다. 순위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들 앞에 최고 기록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거제상고 일짱 필선(이혜리)과 절친 미나(박세완)다.

펌프 위로 올라간 두 사람은 기계에 동전을 넣고 노래를 고른다. 쿵쿵 울려 퍼지는 ‘하여가’. 문화의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명곡에 맞춰 필선과 미나가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카메라가 그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잡아낸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1990년대를 향수로 품고 있는 이들의 심장을 울렸던 ‘퍼스트 슬램덩크’의 오프닝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가볍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한 필선이 말한다. “미나야, 내는 거제가 좁다.” 그렇게 이 청춘들이 기어이 거제를 ‘좁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특별한 응원의 이야기가 경쾌하게 출발한다.

소녀들 삶에 대한 각별한 시선

㈜마인드마크 제공

필선과 미나에겐 춤이 전부다. 꿈은 서울로 가 엄정화, 백지영처럼 시대를 주름잡는 스타들의 백댄서가 되는 것. 하지만 서울행은커녕 거제에서 춤추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함께 활동하던 힙합 댄스 동아리가 해산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동아리 방을 얻을 수 있을까 고심하던 두 사람 앞에 천재일우가 찾아온다. 서울 현대중앙고에서 치어리더로 활동했던 세현(조아람)이 전학을 온 것이다.

필선은 만년 꼴찌인 거제상고 축구팀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치어리딩이 필요하다고 교장을 설득하고, 교장은 응원팀 결성을 허락하고 연습실까지 내준다. 응원부 ‘밀레니엄 걸즈’의 탄생이다. 이들의 면면은 다채롭다. 주장 세현을 필두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을 신봉하는 소희(최지수), ‘비용세’ 용순(권유나), 태권도장 딸 상미(염지영), 세탁소 딸로 의상을 담당하는 유리(이한주), 각기춤의 달인 지혜(박효은), 그리고 음악 믹싱을 맡은 방송반 순정(백하이)까지.

관객이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에 웃음을 짓게 되는 건 영화가 필선과 미나뿐 아니라 조연인 이들 중 누구 하나 시시한 사이드킥으로 소비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늘 “축구 잘하는 동현이 동생 세현이”로 불리는 세현에게 ‘응원단 리더 세현’이라는 이름을 찾아주려는 밀레니엄 걸즈의 노력은 이미 영화가 내장하고 있는 소녀들의 삶에 대한 각별한 시선이기도 하다. 이렇듯 다양한 인간들이 모인 만큼 바람 잘 날 없지만, 서로 합을 맞추고 몸을 단련하는 훈련의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쌓이면서 밀레니엄 걸즈는 더 단단하게 뭉친다.

‘빅토리’(감독 박범수)는 동아리를 배경으로 하는 청춘영화의 장르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웰메이드 상업영화다. 1990년대 가요를 깔고 노스탤지어(향수)를 그 상품성으로 내세우는 여고생들의 성장담이라니, 우리에게는 이미 성공적인 선례가 있다. 2011년에 개봉해서 745만이라는 만만치 않은 흥행 기록을 남긴 ‘써니’(감독 강형철)다. 아니나 다를까, ‘빅토리’를 제작한 안나푸르나필름의 이안나 대표의 대표작 중 한편이 바로 ‘써니’다. 그로부터 13년 후에 등장한 ‘빅토리’는 ‘써니’의 장점을 잘 살린 동시에 그 한계를 제대로 극복했다.

㈜마인드마크 제공

‘써니’는 1985년 고등학교에 입학해 뜨거운 학창시절을 보낸 일곱명의 중년 여성이 다시 만나 과거를 추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큰 사랑을 받은 만큼 신랄한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는데, 특히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희화화하고 자본가로 성공한 춘화(진희경)가 남긴 유산이야말로 여성해방의 동아줄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 동력을 오직 시장자유화에서만 찾았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에 더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서사의 중년 여성 버전이라는 평가도 있었는데, 최고경영자(CEO) 춘화가 제시하는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나머지 6공주가 자기 몫의 유산을 받게 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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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떠맡겨온 ‘응원’의 가치

㈜마인드마크 제공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우정을 그리는 ‘써니’조차 여성을 몰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장에 가두고 그곳이야말로 여성의 자리라고 속삭여온 한국 상업영화의 배타적인 역사인식과 함께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태도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소위 ‘역사’라고 평가되는 자리에 실존했던 여성을 지운다는 점, 다른 하나는 ‘역사’라고 평가되지 못했던 자리에서 여성이 담당해온, 사실은 ‘역사적인 일’을 평가절하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 안에서 역사의 주체로 상상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여성은 사소화되거나 형해화돼왔다.

‘빅토리’가 달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영화는 여성들의 자리를 1999년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그 시대를 살아낸 지역 공동체 안에서 찾는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시대와 괴리된 채 패싸움에 몰두하는 7공주를 그린 저 유명한 슬로모션 신에서의 ‘써니’와 달리, ‘밀레니엄 걸즈’는 시장, 병원, 회사 야유회, 그리고 거제 조선소의 노동자 투쟁 현장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그들과 동시대를 숨 쉰다. 이때 카메라는 부감으로 이들의 응원을 포착함으로써 그들이 놓여 있는 장소성과 시간성을 살린다.

영화의 메시지처럼 우리에겐 응원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역할이 오로지 여성에게만 떠맡겨져왔다는 점일 테다. ‘빅토리’는 여성에게 할당되었던 돌보는 일, 응원하는 일의 가치에 주목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여성들은 다른 일을 꿈꿨고, 시도했고, 그리고 해냈다는 사실 역시 똑똑히 말한다. 영화는 ‘치어리딩’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치어리딩’을 하지 않기 위해서 ‘치어리딩’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의 현실까지 담아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와 함께 보시길 권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11인의 구술을 기록한 책 ‘조선소, 이 사나운 곳에서도’와 조선소에서 일하는 윤화(김금순)의 삶을 다룬 영화 ‘울산의 별’이다. 그리고 배를 만들었던 노동자 김진숙의 에세이 ‘소금꽃 나무’도 함께 읽어보시기를. 참으로 여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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