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나는 차고 매운 향내…누군가의 비극이 우리의 일
‘비극 처리’ 검사의 상념
삶의 끝과도 마주해야 할 숙명
감상 접고 법적 절차 종결해야
사망 정황 샅샅이 살피는 고역
우리 세계 지탱하는 일이기도
모처럼 느긋한 저녁이다. 한낮 뜨거웠던 태양이 뉘엿해지고 아파트 공터에 차려졌던 목요 장터 상인들이 장을 걷는다. 앞머리가 땀에 젖은 아이들이 태권도학원 차량에서 쏟아져 나와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천천히 걸어 퇴근한다. 1인용 이부자리와 최소한의 생활도구들만이 갖춰진 관사,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돌려 먹는다. 오늘은 비교적 평안한 하루였지…. 소파에 길게 누워 잠시 졸았나 싶은 순간, 전화가 울린다. 당직 검사의 이름이 화면에 뜨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 시간에 당직 검사의 전화라면 느긋과는 거리가 먼 일일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비극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는 상태로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는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언제라도 비극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인 것처럼.
“부장님, 편한 저녁 보내고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김 검사는 항상 깍듯하게 서두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인다. 그의 경쾌한 목소리가 ‘다름이 아니라’에서 잠시 방황하다가 프로답게 곧바로 본론으로 질주한다.
“지역에 있는 사업장에서 60대 남자 사망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련 언론 보도 링크로 보내드렸습니다. 기록이 지금 막 경찰에서 올라왔는데요, 자세한 사항은 살펴보고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검사와 나는 최대한 간명하게 용건을 주고받는다. ‘아이고 이런’ ‘어쩜 그런 일이’ 같은 말들은 생략한다. 지금은 감상을 나눌 때가 아니라 사실을 파악하고 조치를 취할 때다. 김 검사는 지금부터 기록 속에 담긴 그 남자의 사망 경위에 대해 파악할 것이고, 나는 그의 보고를 기다릴 것이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끊기는 전화기 너머로 김 검사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의 느긋한 저녁도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김 검사가 지금부터 살펴볼 일을 ‘변사 사건’이라고 한다.
느긋한 저녁 공기 깬 ‘변사 보고’
변사란 자연사를 제외한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이 노화나 질병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떤 변에 의해 죽은 경우를 말한다. 어떤 변에 의해 발생한 돌연한 죽음에 대해서는 경찰과 검사가 그 죽음의 원인을 살펴야 한다. 어떤 이유로 사망하였는지, 그 죽음이 혹시 타살은 아닌지 검토하는 것이다. 먼저 현장과 사체를 확인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듣는 등 1차 조사를 하는 것은 경찰이지만, 검사는 초기 단계에서 사체를 부검할지, 그대로 인도할지를 결정하고 사건에 대한 수사 의견도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타살의 의심이 없다고 판단될 때 내사 사건의 종결을 승인한다.
세상에 자연사가 아닌 죽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도, 검사가 그 많은 변사 사건의 처리에 관여하게 된다는 사실도 검사가 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상태에서 주검을 마주하는 일은 각오를 단단히 해도 언제나 두렵고 어려웠다. 심하게 훼손되어 보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더라도 죽음의 변고를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품고 있는 파동에 마음이 자꾸만 묵직해졌다.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하는 일을 하겠다고 검사가 되었는데, 삶의 끝에서 나는 차고 매운 냄새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검사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 검사는 우선 기록을 볼 것이다. 기록에 편철되어 있는 119신고 내역서와 사체검안서, 사망진단서와 사체의 사진을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검사가 직접 현장에 나가 사체를 살피는 경우도 있지만, 현장에 나가지 않는 경우에도 기록에 편철된 사진과 상황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목격자와 유족의 진술조서를 읽고, 기록에 담기지 않은 사정들이 있는지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해 물어보기도 한다. 경찰관은 피로와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가 아는 것들을 검사에게 전할 것이다. 지역의 작은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는 60대 남자가 물건을 옮기는 기계장치에 끼여 사망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 내에 경찰관은 많은 것을 조사하고 기록으로 만들었다. 급히 차려진 빈소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인지, 변사 사건의 기록에서는 종종 옅은 향냄새가 났다.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경찰관과 김 검사의 사정에 비해 나의 사정은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퇴근 후 소파에 누워 있다가 당직 검사의 전화를 받고 몸을 반쯤 일으켰으나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김 검사가 기록을 검토하고 1차적 판단을 한 뒤 보고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러나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다음 전화를 기다리는 그 저녁의 공기는 미묘하게 변한다. 나에게도 더 이상 느긋한 저녁은 없다.
얼핏 평안해 보이는 세상의 어느 귀퉁이가 삐걱 일그러질 때, 누군가의 비극이 발생한 지점에서 우리의 일은 시작된다. 맡은 역할에 따라 누군가는 달려 나가 현장을 헤집고, 누군가는 현장에서 올라온 기록을 분석하고 또 누군가는 분석 결과를 보고받아 승인하려고 대기한다. 이것은 마치 컨베이어벨트 같다. 어떤 이의 비극이 수사 시스템이라는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점점이 전해지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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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망자와 남겨진 이들
컨베이어벨트의 끝자락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아 나는 내가 모르던 어떤 이의 죽음을 생각한다. 정확히는,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 후 남은 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나처럼 아침에 일을 하러 출근한 가족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자의 일상을 중단하고 한데 모였을 가족들, 누군가는 경찰의 조사에 대답하고 누군가는 장례식장을 구하고 부고 문자를 보내고 있을 밤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무안하게 느껴진다.
밤이 이슥한 시간, 검토를 마친 당직 검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비교적 명확한 죽음이었다고 검사는 말한다. 사고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고 타살의 의심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비극의 발생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좀 더 긴 시간을 들여 할 일이다.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사체를 유족에게 인도하도록 하고 우리도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이로써 오늘의 상황은 종료되었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창밖으로 길게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신경이 잠시 곤두선다. 이 순간에도 세상의 어느 한쪽에서는 비극들이 발생한다. 검사의 일은 이 시대의 비극 처리 시스템의 일부다. ‘역시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니야’ 생각하다가, 그럼에도 죽은 이의 사정을 살피는 일은 살아 있는 우리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감상과 상념은 생략하고 이제 잠에 들어야 한다. 내일은 내일 몫의 비극들이 내 앞에 도착할 것이다. 가족을 잃은 누군가의 슬픔이 고요히 깊어 가는 밤. 물색없이 잠을 청한다.
부산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9년차 검사 정명원이 일하면서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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