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이기면 나도 이긴다, 거짓말처럼 무서움이 사라졌다 [ESC]

한겨레 2024. 8. 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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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 주짓수
대회 대비 파트너로 만난 에이
나와 함께 느끼는 유일한 사람
2인팀, 내 주짓수 다시 시작돼
지난달 21일 서울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열린 주짓수 대회에 참가한 양민영 작가(왼쪽)가 심판의 승자 선언에 임하고 있다. 조준서 제공

매트 위에 서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제자리에서 두어 번 숨을 고르는 중에 입장하라는 신호를 받고 매트를 가로질러 걸어 들어갔다. 상대 선수와 마주 서기까지 펜스 밖에서 구경 중인 수십 명의 시선이 온몸에 꽂혔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거였다.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특별히 불만 따위 없지만 만족도 없는 날이 계속됐다. 입안에서는 밍밍한 맛만 느껴졌고 급기야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였다. 안전하고 기복은 없으나 모든 경계와 이면이 다 뭉뚱그려져 지루하기 짝이 없다. 흑이면 흑, 백이면 백, 맵거나, 짜거나, 달거나 뭐라도 좋으니까 단순하고 분명한 게 간절했다. 예를 들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오롯이 하나의 현상만 존재하는 세계 같은 것 말이다.

나를 보자마자 안겨 울기 시작

매트 위의 세계가 그렇다. 두 사람이 맞붙어서 한쪽이 이기고 상대는 지는 것만큼 분명한 건 없다. 싸우는 이들은 욕망은 그보다도 더 확실하다. 누구나 잘 싸우고 지는 것보다 형편없어도 이기는 쪽을 원한다. 그래서 서로의 라펠(도복 상의의 깃이 접히는 부분)을 잡기 위해 손을 뻗는 그 짧은 순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이기길 원하는 만큼 상대도 그걸 원한다는 걸.

상대가 나를 당기는 동작이 내가 상대를 잡아당긴 것보다 조금 더 빨랐다. 마침내 힘과 힘이 팽팽하게 대치되던 순간 기나긴 소설의 첫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빗장이 풀리고 베일이 걷히는 느낌. 상대가 더 강한 게 느껴졌고 경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예감은 낯설지 않았다. 경기를 준비하며 훈련하는 동안에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자기암시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대진 상대들이 나보다 열 살도 넘게 어리다는 악조건, 갑작스러운 체중 감량, 체력을 넘어선 훈련량보다 좀처럼 나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문제였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외로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말고도 수렁에 빠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대회에 함께 참가하기로 한 동료 에이였다.

주짓수 대회를 대비하는 훈련에는 반드시 비슷한 체급의 파트너가 필요하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일종의 가상훈련을 진행하는데 이때 연습 파트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에이는 나와 비교해서 수련 기간이 짧고 체구도 작아서 훈련을 소화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주짓수 대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근육통과 피로 때문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밝게 웃었다. 그는 내가 느낀 모든 걸 함께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공유한 세계는 경계가 확실하다 못해 잔인하도록 분명한 지경이라, 그런 에이조차도 파트너이면서 경쟁 상대였다. 에이가 가장 특별한 동료이긴 하지만 나 자신은 아니지 않는가? 또 대회 직전에 있었던 승급이 더욱 경쟁심을 부추겼다. 만약에 나는 보기 좋게 졌는데 에이가 초심자의 행운으로 이긴다면? 이런 마음이 저열하다는 걸 알지만 에이와 비교해서 못나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 벨트인 에이의 경기가 먼저였다. 에이는 연습한 대로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갔다. 비록 1점 차로 패했지만 나는 그가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트에서 내려와 나를 보자마자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좀처럼 울지 않는 그인데 뜻밖이었다. 이 비슷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봤을 때 에이가 아니라 내가 울 거라고 예상했다. 원래도 툭하면 잘 울고 둘 중에서 더 감정적인 쪽은 나였다. 에이가 말했다. “점수에서 뒤졌고 종료는 다가오고 더 공격해야 했는데 무서웠어요.” 그 말이 다시 한번 강력한 암시가 되어 머리에 박혔다. 몇 시간 뒤 에이가 말한 무서움이 나를 덮쳤다. 나는 훈련할 때만큼도 움직이지 못하고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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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엔 오직 나뿐이었지만

경기는 끝났고 매트를 지배하는 분명함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분명한 사실에 따르면 우리는 패자이고 부끄러운 처지가 됐다. 그런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내가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인 동시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누구나 원하는 모습대로 나이 드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향하는 어쩔 수 없는 불만이 있는데 그건 바로 갈수록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돼간다는 거였다. 머릿속에 오직 나뿐이었다. 나의 위치, 나의 상황, 나의 목표, 나의 이득….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해도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걸까? 남에게 한도 끝도 없이 인색한 내가 가끔 징그러웠다.

에이가 매트 위에 섰을 때 나는 펜스 밖에 서서 에이가 이기고 내가 지는 경우의 수나 따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걷힌 그의 얼굴, 주먹을 꼭 쥔 두 손을 응시했다. 이제 겨우 화이트 벨트지만 주짓수에 빠져서 대회까지 참가한 에이의 용기,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함께 연습했던 시간, 그런 것들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그러다가 에이가 회심의 초크(목을 조르는 기술)를 시도하던 순간 저절로 깨달았다. 에이가 이기면 나도 이긴다. 마찬가지로 나의 승리는 에이의 승리다.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번씩만 주어진다. 남들은 다 한 번씩 싸운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 싸운다. 이번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비록 둘뿐이지만 우리는 진정한 팀이라는 걸. 그러자 거짓말처럼 무서움이 사라졌다. 혼자만 패자가 되는 상황마저 두렵지 않았다. 모든 걸 걸고 싸운 순간은 오직 나만의 것이고 주짓수를 좋아하는 이 마음도 나의 것이다. 누구를 이해시키거나 설득할 필요 없는 순수한 내 것이자 우리의 것.

주짓수에 관해서라면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심지어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 어떻게 모르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경험하며 알게 되겠지만 어떤 부분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무섭고 어리석지만 그래도 괜찮다. 서로의 공을 기꺼이 나눌 사람이 있고 언제든 헌신할 수 있는 팀이 생겼으니까. 그날 이후 나의 주짓수는 다시 시작됐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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