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애가 4대 혈연 세습? 확증편향에 따른 과대해석!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2024. 8. 31. 09:00
[한반도 지오그래픽] ‘또 하나의 수령’ 北 후계자 논란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개인 독재의 확립을 위해 1960년대부터 공을 들여온 '주체' 사상은 공산당에 의한 집단 통치를 정당화하는 '유물론'을 부인한다.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심론'은 "뛰어난 혜안을 가진 철인(哲人)적 지도자가 인민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사회주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러한 지도자가 바로 '수령'이다.
1970년대 초반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혈연 승계가 시작되면서 또 하나 추가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혁명가계론'이다. 인민들을 영도할 지도자, 즉 수령은 일정한 혈연적 전통이 필요하다는 이 이론을 앞세워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세습을 정당화했다. '주체사상'과 '혁명가계론' 두 가지를 결합할 경우, 북한에서 '수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은 간단하다. '김일성 가계의 인물'이며, 설사 누군가가 그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할 경우에도 기존 통치 이데올로기상으로는 김일성의 아들 혹은 손자, 즉 '백두혈통'을 넘어서는 정통성을 획득할 수 없다. 권력을 향한 도전은 정통성 문제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수령' 가계에 대한 순응과 복종을 유발하게 된다.
북한처럼 사회주의와 유교 전통이 혼재한 곳에서 여성이 '수령'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지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떤 다른 혈통의 남성도 '백두혈통'의 여성보다 높은 정통성을 지니기 힘들며, 이것이 김주애가 후계자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다.
첫째는 권력 구도와 권력 엘리트의 공동운명체 의식이다. 북한에서 권력을 '세습'해 온 것은 백두혈통만이 아니다. 북한 권력 엘리트들 역시 선대(先代)의 뒷 배경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공식 서열 2위에 속하는 최용해 역시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최현의 자식이다. 이들은 그동안 수령 독재에 봉사해 왔고, 그를 통해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다.
최고 엘리트들에게만 기득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권 창건 이후 북한 사회를 유지해 온 것은 바로 '성분'이었고, 최고 성분이라 할 수 있는 '핵심계층'은 '동요계층'이나 '적대계층'에 비해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 독재나 사회적 통제보다 더 피하고 싶은 상황은 민중봉기나 혁명으로 인해 자신들이 사회의 평범한 일원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권력 엘리트의 충성 심리를 변화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 '공포정치'의 수위 조절 실패로 인해 권력 엘리트들이 보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숙청에 대한 공포를 더 느끼게 될 경우, 더욱이 고립과 제재 국면 속에서 사회나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 전가를 우려하게 될 때, 이들은 자포자기식으로 권력에 도전하려는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핵심계층 역시 경제난으로 인해 경제적 보상이 어려워지거나, 장마당 경제로 인해 계층 변동이 발생할수록 상대적 박탈감과 반발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경험 부재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민주화 좌절에서도 나타났지만, 특정 사회에서 민주화나 시장경제의 경험이 적을수록 시민들의 반발이 체제 변동으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구소련에 의해 점령되기 이전까지 대부분 입헌군주제나 의회제도 그리고 시장경제를 경험했던 동유럽 국가들이 1980∼90년대 공산권 체제 변동 시기에 민주화·시장화로 복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한 역시 공산화 이전 경험했던 것은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에 불과하다. 최근 반(反)김정은 정서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한에는 아직 과거 독일의 노이에스 포럼,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포럼 등과 같이 시민들의 불만을 조직화할 운동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후반 이후 정보화 추세로 인해 북한 역시 외부 정보와 완전히 절연하기가 불가능한 여건이 됐다는 점은 미래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국제적 후원자 그룹이다. 과거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 정권이나 국가에서의 체제 변동이나 개혁이 다른 체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이에 적극 개입했다. 1956년의 헝가리 시민혁명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체제 개혁에 구소련이 개입했던 것 역시 "사회주의권의 안보는 집단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공산권에서 일어난 반사회주의 쿠데타나 민중봉기는 사회주의 종주국에 의해 진압될 가능성이 컸다. 이 요인은 김정은 시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2022년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집권 3기를 연 중국, 2024년 대선을 통해 사실상 푸틴 영구 집권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와 북한의 정치체제 유사성은 오히려 냉전 시기보다 강화됐다. 북한의 수령제가 공산당 독재라는 원칙에 비추어 이단적 존재로 여겨지던 냉전 시기와는 달리 주변국 개입의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독재자는 외부 국가들에 대해서도 우월한 지위를 누리려 해 인근 국가와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는 경제적 성취 능력이다. 절대빈곤 사회에서는 오히려 개개인이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혹은 변혁 이후 사회가 더 참담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혁명이나 반란 등의 사회적 변환은 주민들의 기대를 정권이 충족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발생하곤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 북한은 일시적으로 경제적 성공을 제공하거나(1960년대까지), "이밥에 고깃국" 식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거나(1970년대), 적당하게 주민들을 빈곤하게 만들면서 외부의 견제나 방해를 강조하는(1980년대) 방법을 통해 수령제를 유지했다. 북한 경제가 극한적 난국에 빠진 '고난의 행군(1996∼1998)'은 역설적으로 북한 주민들이 정권에 기대하는 수준을 최소한도로 낮춤으로써 정권 유지에 기여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정권이 기본적 식량이나 생필품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식량 확보를 위해 여행 통제를 풀어주거나 개인경제(장마당)를 일부 허용하는 수준이면 만족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선대와의 차별화를 위해 북한 경제의 상황을 '생존'이 아닌 '발전'으로 표방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기대 수준을 높이는 위험성도 함께 키웠다. 이제 김정은과 그 후계자에게는 선대가 활용했던 외부책임론도, 경제 비전을 이용한 '희망 고문'도 점점 더 효용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섯째, 주민 의식의 변화다. 과거 북한 사회의 특징은 주민의 생애주기 전체를 체제가 통제한다는 점이었다. 유아들은 출생 수개월 만에 정권이 운영하는 탁아소에서 성장했으며, 이들에게 부모의 품보다 더 익숙한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 선전물이었다. 인력집약적 경제 운용을 위해 여성 노동력까지 집단농장과 기업소에 동원한 결과였다. 이후 성장 과정에서 소년단·청년단 등 집단 활동이 유아기의 정치사회화 결과를 보강했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파탄기에 들어선 1990년대부터 공장 가동률 저하로 육체노동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생겨난 개념이 전업주부 즉 '가두여성'이었다. 체제가 아닌 부모가 아동을 양육했고, 이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할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이제 북한 사회의 20대와 30대를 차지했고, 그들은 더 많은 외부 정보를 접하기 시작했다. 북한판 MZ 세대가 미래 북한 체제의 안전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첫째, 김주애 후계자 수업이 진정한 승계 준비보다는 건강상 혹은 정책 성과에 대한 김정은의 강박관념 때문에 시작됐을 수 있다. 후계자는 단순히 지명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지도자 부재 시 실질적으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김주애는 지금 그럴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김주애는 정권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김정은 자신과 인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방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만약 김주애의 오빠가 존재한다면 유학이나 여타 이유로 당장 전면에 나서기 힘든 시기를 김주애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김주애 후계자 수업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들 역시 확증편향에 따른 과대 해석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제분'이라는 표현을 제외하면 '샛별 여장군'은 노동당 내부 학습에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을 뿐이고, '향도들' 역시 김주애만을 특정한 것이 아닌 복수의 인물을 표현한 용어다. 김주애에 대한 호칭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김주애가 위치하는 주석단 위치는 오히려 밀렸다는 지적도 있다.
셋째, 북한의 혈연 계승 역사상 누군가가 후계자로 정말 확정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경쟁자들을 먼저 격하하거나 도태시켰다. 이는 '백두혈통' 내의 인물들을 겨냥했다. 김정일 승계 과정에서 김영주가, 김정은 승계 과정에서 이복형인 김정남이 그 희생양이었다. 만약 김주애가 후계자로 확정됐다면 김여정이 단순히 조카에게 존대 제스처를 쓰는 정도가 아니라 신상에 먼저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 길을 넘어 실제로 후계자로 확정됐다고 해서 김주애가 김씨 가계의 또 하나의 '수령'이 되는 것을 결코 보장하지는 않는다. 수령제를 지탱해 온 방파제가 거꾸로 거대한 파도로 변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 ‘주체사상’과 ‘혁명가계론’으로 혈연 세습 정당화
● 김주애, ‘백두혈통’ 빼면 지도자로서 검증 안 돼
● 수령제 지탱해 온 방파제, 거대한 파도로 변할 수도
8월 4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하 김정은)은 250기의 '신형전술탄도미사일' 발사대를 전방 지역 부대에 배치하는 인계인수기념식에 딸 김주애를 동반했다. 이 자리에서 고모인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하 김여정)은 김주애를 깍듯이 예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앞서 국가정보원은 7월 말 국회 정보위원회 현안 보고를 통해 김주애가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2022년 11월 '화성-17형' 장거리탄도미사일(ICBM) 발사 현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주애의 호칭 역시 '존귀한 자제분' '사랑하는 자제분' '조선의 샛별 여장군'(2023년 11월)을 거쳐 '향도의 위대한 분들'(2024년 3월 15일)로 격상돼 왔다. 향후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현재로서는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백두혈통과 북한 '수령'의 자격
북한이 아무리 국제적으로 고립됐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체제가 형식상으로라도 '민주'를 표방하는 현대에서 4대 혈연 세습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2013년생(추정)인 김주애는 11세 남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김정은의 후계자로 거론될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은 바로 '백두혈통'이기 때문이다. 이는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기점으로 북한에 수령제 독재가 확립되면서 핵심 통치 철학으로 자리 잡은 '주체'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개인 독재의 확립을 위해 1960년대부터 공을 들여온 '주체' 사상은 공산당에 의한 집단 통치를 정당화하는 '유물론'을 부인한다.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심론'은 "뛰어난 혜안을 가진 철인(哲人)적 지도자가 인민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사회주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러한 지도자가 바로 '수령'이다.
1970년대 초반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혈연 승계가 시작되면서 또 하나 추가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혁명가계론'이다. 인민들을 영도할 지도자, 즉 수령은 일정한 혈연적 전통이 필요하다는 이 이론을 앞세워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세습을 정당화했다. '주체사상'과 '혁명가계론' 두 가지를 결합할 경우, 북한에서 '수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은 간단하다. '김일성 가계의 인물'이며, 설사 누군가가 그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할 경우에도 기존 통치 이데올로기상으로는 김일성의 아들 혹은 손자, 즉 '백두혈통'을 넘어서는 정통성을 획득할 수 없다. 권력을 향한 도전은 정통성 문제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수령' 가계에 대한 순응과 복종을 유발하게 된다.
북한처럼 사회주의와 유교 전통이 혼재한 곳에서 여성이 '수령'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지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떤 다른 혈통의 남성도 '백두혈통'의 여성보다 높은 정통성을 지니기 힘들며, 이것이 김주애가 후계자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다.
‘수령 독재'의 버팀목, 그리고 변화의 징후
북한 사회에는 그동안 수령 독재를 보장해 온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같은 요인들이 변화하고 있다.
첫째는 권력 구도와 권력 엘리트의 공동운명체 의식이다. 북한에서 권력을 '세습'해 온 것은 백두혈통만이 아니다. 북한 권력 엘리트들 역시 선대(先代)의 뒷 배경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공식 서열 2위에 속하는 최용해 역시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최현의 자식이다. 이들은 그동안 수령 독재에 봉사해 왔고, 그를 통해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다.
최고 엘리트들에게만 기득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권 창건 이후 북한 사회를 유지해 온 것은 바로 '성분'이었고, 최고 성분이라 할 수 있는 '핵심계층'은 '동요계층'이나 '적대계층'에 비해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 독재나 사회적 통제보다 더 피하고 싶은 상황은 민중봉기나 혁명으로 인해 자신들이 사회의 평범한 일원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권력 엘리트의 충성 심리를 변화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 '공포정치'의 수위 조절 실패로 인해 권력 엘리트들이 보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숙청에 대한 공포를 더 느끼게 될 경우, 더욱이 고립과 제재 국면 속에서 사회나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 전가를 우려하게 될 때, 이들은 자포자기식으로 권력에 도전하려는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핵심계층 역시 경제난으로 인해 경제적 보상이 어려워지거나, 장마당 경제로 인해 계층 변동이 발생할수록 상대적 박탈감과 반발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경험 부재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민주화 좌절에서도 나타났지만, 특정 사회에서 민주화나 시장경제의 경험이 적을수록 시민들의 반발이 체제 변동으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구소련에 의해 점령되기 이전까지 대부분 입헌군주제나 의회제도 그리고 시장경제를 경험했던 동유럽 국가들이 1980∼90년대 공산권 체제 변동 시기에 민주화·시장화로 복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한 역시 공산화 이전 경험했던 것은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에 불과하다. 최근 반(反)김정은 정서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한에는 아직 과거 독일의 노이에스 포럼,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포럼 등과 같이 시민들의 불만을 조직화할 운동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후반 이후 정보화 추세로 인해 북한 역시 외부 정보와 완전히 절연하기가 불가능한 여건이 됐다는 점은 미래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국제적 후원자 그룹이다. 과거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 정권이나 국가에서의 체제 변동이나 개혁이 다른 체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이에 적극 개입했다. 1956년의 헝가리 시민혁명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체제 개혁에 구소련이 개입했던 것 역시 "사회주의권의 안보는 집단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공산권에서 일어난 반사회주의 쿠데타나 민중봉기는 사회주의 종주국에 의해 진압될 가능성이 컸다. 이 요인은 김정은 시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2022년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집권 3기를 연 중국, 2024년 대선을 통해 사실상 푸틴 영구 집권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와 북한의 정치체제 유사성은 오히려 냉전 시기보다 강화됐다. 북한의 수령제가 공산당 독재라는 원칙에 비추어 이단적 존재로 여겨지던 냉전 시기와는 달리 주변국 개입의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독재자는 외부 국가들에 대해서도 우월한 지위를 누리려 해 인근 국가와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는 경제적 성취 능력이다. 절대빈곤 사회에서는 오히려 개개인이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혹은 변혁 이후 사회가 더 참담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혁명이나 반란 등의 사회적 변환은 주민들의 기대를 정권이 충족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발생하곤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 북한은 일시적으로 경제적 성공을 제공하거나(1960년대까지), "이밥에 고깃국" 식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거나(1970년대), 적당하게 주민들을 빈곤하게 만들면서 외부의 견제나 방해를 강조하는(1980년대) 방법을 통해 수령제를 유지했다. 북한 경제가 극한적 난국에 빠진 '고난의 행군(1996∼1998)'은 역설적으로 북한 주민들이 정권에 기대하는 수준을 최소한도로 낮춤으로써 정권 유지에 기여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정권이 기본적 식량이나 생필품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식량 확보를 위해 여행 통제를 풀어주거나 개인경제(장마당)를 일부 허용하는 수준이면 만족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선대와의 차별화를 위해 북한 경제의 상황을 '생존'이 아닌 '발전'으로 표방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기대 수준을 높이는 위험성도 함께 키웠다. 이제 김정은과 그 후계자에게는 선대가 활용했던 외부책임론도, 경제 비전을 이용한 '희망 고문'도 점점 더 효용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섯째, 주민 의식의 변화다. 과거 북한 사회의 특징은 주민의 생애주기 전체를 체제가 통제한다는 점이었다. 유아들은 출생 수개월 만에 정권이 운영하는 탁아소에서 성장했으며, 이들에게 부모의 품보다 더 익숙한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 선전물이었다. 인력집약적 경제 운용을 위해 여성 노동력까지 집단농장과 기업소에 동원한 결과였다. 이후 성장 과정에서 소년단·청년단 등 집단 활동이 유아기의 정치사회화 결과를 보강했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파탄기에 들어선 1990년대부터 공장 가동률 저하로 육체노동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생겨난 개념이 전업주부 즉 '가두여성'이었다. 체제가 아닌 부모가 아동을 양육했고, 이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할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이제 북한 사회의 20대와 30대를 차지했고, 그들은 더 많은 외부 정보를 접하기 시작했다. 북한판 MZ 세대가 미래 북한 체제의 안전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김주애로 승계, 여전히 먼 길
현재까지 김주애가 누구보다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에 가까운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버지와 함께 숱한 행사에 참가하고 있고, 아직 초보적이지만 그녀를 특정하는 칭호도 생겼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김주애를 정말 후계자로 단정하기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그것은 첫째, 김주애 후계자 수업이 진정한 승계 준비보다는 건강상 혹은 정책 성과에 대한 김정은의 강박관념 때문에 시작됐을 수 있다. 후계자는 단순히 지명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지도자 부재 시 실질적으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김주애는 지금 그럴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김주애는 정권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김정은 자신과 인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방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만약 김주애의 오빠가 존재한다면 유학이나 여타 이유로 당장 전면에 나서기 힘든 시기를 김주애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김주애 후계자 수업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들 역시 확증편향에 따른 과대 해석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제분'이라는 표현을 제외하면 '샛별 여장군'은 노동당 내부 학습에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을 뿐이고, '향도들' 역시 김주애만을 특정한 것이 아닌 복수의 인물을 표현한 용어다. 김주애에 대한 호칭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김주애가 위치하는 주석단 위치는 오히려 밀렸다는 지적도 있다.
셋째, 북한의 혈연 계승 역사상 누군가가 후계자로 정말 확정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경쟁자들을 먼저 격하하거나 도태시켰다. 이는 '백두혈통' 내의 인물들을 겨냥했다. 김정일 승계 과정에서 김영주가, 김정은 승계 과정에서 이복형인 김정남이 그 희생양이었다. 만약 김주애가 후계자로 확정됐다면 김여정이 단순히 조카에게 존대 제스처를 쓰는 정도가 아니라 신상에 먼저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 길을 넘어 실제로 후계자로 확정됐다고 해서 김주애가 김씨 가계의 또 하나의 '수령'이 되는 것을 결코 보장하지는 않는다. 수령제를 지탱해 온 방파제가 거꾸로 거대한 파도로 변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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