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공장에서 대법원까지, 한국지엠 비정규직의 3457일 [전국 인사이드]
2020년 가을 경남 창원시에서 배성도씨를 만났다. 옷소매에 한국지엠 로고가 새겨진 칼라 티셔츠를 입고 있던 모습이 선연하다. 그가 맡은 직책은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이었다.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585명은 2019년 12월31일부로 해고당했다. 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결연한 의지와 막연한 심정을 교차하여 내비쳤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일단 여기저기 계속 뛰어다녀보는 거죠. 그런데 저도 생계가 어려워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 신문에서 배성도씨를 다시 봤다. 비정규직지회장 대신 이번엔 비상대책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단 그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서 있었다. “한국지엠은 불법파견을 사과하라!” 짧은 외침에 얼마나 깊은 울분이 담겨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회사 측의 불법파견을 인정받았지만 지나간 세월까지 보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7월25일, 대법원은 한국지엠 사내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한국지엠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심의 일부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판결로 한국지엠은 사내 협력업체 직원을 직접 고용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더불어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복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소송 쟁점은 사내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한국지엠에 직접 지휘·감독을 받는지 여부였다. 항소심은 “한국지엠은 사내 협력업체가 고용한 원고들을 한국지엠 정규직들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케 했다”라며 “한국지엠이 사실상 원고들을 직접 지휘·감독한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대법원도 항소심 판단을 수긍했다. 이로써 2015년 시작된 기나긴 소송은 3475일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1991년 준공돼 티코부터 마티즈, 스파크 등 경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해왔다. 창원국가산업단지 핵심 사업장 중 하나로 부품 공급 협력업체까지 포함해 지역 내 수만 명과 고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창원공장에서 그간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백 명씩 해고당해도 창원 지역 여론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나도 2019년 대량해고 사태 이후 기사를 줄기차게 썼지만, 비정규직은 회사가 어려우면 해고도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 처지에서 노사 간 쟁점인 파견법 위반 여부를 이해하기에는 문턱이 높았다.
기습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빠듯한 생계 탓에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한국지엠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길 기다리거나,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채용해주는 갈라치기 획책으로 대응했다. 해고 당사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안은 금방 잊혔다.
대법원 선고 이후에도 묵묵부답 한국지엠
소송이 10년이나 걸린 데는 한국지엠이 시간을 끈 탓이 크다. 한국지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간을 분리하는 이른바 ‘블록화’를 통해 불법파견 문제를 해소했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분쟁의 시초는 20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조는 그해 1월 고용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다. 당시 고용노동부는 한국지엠이 창원공장 비정규직 843명 전원을 불법파견했다고 인정하고 파견법 위반 혐의로 한국지엠 사장과 협력업체 대표를 고소했다. 이들은 2013년 2월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됐다. 그해 6월 비정규직 노동자 5명이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12월 1심 법원은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그러자 이듬해 1월 또 다른 노동자들이 소송을 냈다. 이후 3·4차 소송단도 구성됐다. 1차 소송은 2016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 확정됐다. 이번에 대법원 판결이 난 소송은 2~4차 소송이다.
노조는 대법원 선고 직후 회사 측에 교섭 요구 공문을 보냈다. 대법원 선고로 한국지엠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 고용할 의무가 생겼으니, 교섭을 통해 구체적인 조건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연이은 불법파견 판결에도 법정 다툼을 지난하게 끌고 왔던 한국지엠은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김연수 (<경남도민일보> 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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