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여름 등산도 꽤 괜찮네!”…들꽃구경 삼매경에 어느덧 정상 [ESC]

한겨레 2024. 8. 3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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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백패킹 충북 소백산
마타리꽃, 동자꽃 등 ‘천상의 화원’
높아질수록 시원, 완벽한 ‘산캉스’
소백산의 여름 야생화인 황금빛 마타리꽃.

청명한 하늘 아래 천상의 화원, 8월의 소백산은 시원했다. 더위가 한껏 무르익은 8월 둘째주 토요일 아침 9시, 충북 단양군 가곡면의 새밭 유원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소백산국립공원 어의곡탐방지원센터 앞의 이 주차장은 주차면이 고작 20대 남짓한 작은 공영 주차장이다. 다행히 주차장은 붐비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나와 아들은 등산화 다이얼을 조이고 등산스틱을 펼쳤다. 평소와 같이 아들의 등산 스틱 길이를 조절했지만 조금 모자랐다. 눈금 한 칸(약 1㎝)을 더 늘리고 나서야 편하게 맞는 걸 보니 아들의 키가 자란 모양이다. 어의곡탐방지원센터에서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에 방문 인증 도장을 찍으며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길에 접어들자 매미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고, 울창한 숲이 만들어 낸 나무 그늘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로부터 나와 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유혹하는 계곡 물소리

한여름 소백산의 풍경을 만끽하고 있는 8살 아들.

“아빠! 우리 교장선생님도 소백산에 올라가 보셨대!” 느닷없이 소환된 교장선생님 이야기에 나는 어찌 된 영문이냐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 중간 놀이 시간에 친구들하고 교장실 놀러 가서 오목 뒀거든. 어제 교장 선생님이 물어보셨어. 요즘도 산에 자주 가냐고. 그래서 이번 주엔 소백산 비로봉이랑 연화봉에 갔다가 대피소에서 하루 자고 내려올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교장 선생님도 같은 코스를 가보셨대. 날이 더우니깐 물 충분히 마시며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셨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아들은 다음 말을 이었다. “참, 오목은 내가 다 졌어. 아빠보다 훨씬 잘 두시더라!” 교장 선생님의 응원 덕분인지 여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초2 아들이었다.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학교의 담장 위를 걷는 교장선생님이 새삼 감사했다.

비탈진 등산로를 십여 분 오르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때마침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가 우리를 유혹했다. 물가에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 활짝 편 양손을 천천히 담갔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청량감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계곡물에 적셨다. 그리고 아들의 땀을 닦아주었다. “앗 차가워!” 젖은 손수건이 볼에 닿는 순간 아들은 놀라는 듯했지만, 싫지는 않았던지 이마와 목덜미를 저항 없이 내주었다. 계곡에서의 짧은 유희를 만끽한 우리는 다시 걸음을 이었다. 해수욕장과 워터파크, 그리고 키즈카페가 가고 싶었다던 여덟 살의 여름방학이 어느덧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을 딛고 산을 오르며 지난 방학을 돌아봤다.

제법 긴 계단의 끝에 오르자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아빠, 아까보다 공기가 시원해졌어! 우리 제법 높이 올라왔나 봐. 지금 해발 고도가 얼마야?” 나는 손목에 찬 스포츠 시계를 확인했다. “와, 정말이네. 해발 1100m를 막 지났어!” 해발고도가 100m 상승할 때마다 기온은 0.4~0.6도가 낮아진다. 평균값인 0.5도로 계산하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산 아래 동네보다 약 5.5도가 낮은 셈이다.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는 더 낮아진다. 시원함을 느꼈던 것이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니었던 거다. 우린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고, 숲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더할 나위 없는 슬기로운 여름나기, 완벽한 산캉스(산에서 즐기는 바캉스)다!

잠시 숨을 고른 우리는 유유한 숲속으로 이보했다. 걷다 보니 빽빽하던 나무숲은 차츰 듬성드뭇해졌고, 오래지 않아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엔 마치 솜사탕을 뜯어놓은 듯 하얀 구름이 떠다녔고, 아래엔 끝없이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내가 유년 시절 즐겨봤던 한국교육방송(EBS)의 한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하얀 캔버스에 무심한 듯 물감을 툭툭 찍고 쓱쓱 긁은 뒤 “어때요, 참 쉽죠?”라고 말하며 그림 한 폭을 뚝딱 그려내던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은 마치 그 밥 아저씨의 그림 같았다. “아빠, 여기 좀 봐. 여기도 꽃이고 저기도 꽃이야. 꽃이 엄청 많아!” 잘 그려진 미술작품 같은 소백산의 여름 정취를 감상하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 들꽃, 야생화였다.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과 구름과 부드러운 능선이 어우러진 푸른 초원 곳곳에 형형색색의 여름 야생화가 어우러진 풍경, 천상의 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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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없어도 시원한 대피소

분홍빛 둥근이질풀꽃.

꽃 이름이 궁금하다는 아들을 위해 휴대전화의 스마트렌즈 앱을 실행시켰다. 황금빛의 마타리꽃, 옅은 분홍빛의 둥근이질풀꽃, 진한 다홍색의 동자꽃, 하얀 날개를 뽐내는 참취꽃과 복슬복슬한 순백색의 당근꽃 등. 꽃 이름 찾기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어의곡삼거리에 도착했다. ‘좌측 2.7㎞ 국망봉, 우측 400m 비로봉’ 이정표를 보자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상이 가까웠다. 우린 경쾌한 발걸음으로 소백산의 주봉을 향했다. 오후 1시, 하늘에 맞닿은 비로봉(1439.5m)에 도착했다. “이야, 너 정말 대단하다. 어른도 이렇게 힘든데!” 먼저 도착해 정상을 만끽하고 있던 산객들이 너도나도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 여성 산객은 젤리 한 봉지를 아들 손에 쥐여주었고, 또 다른 남성 산객은 작은 초코바를 건넸다. 아들은 나를 돌아봤고, 나는 받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아들은 수줍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이모, 삼촌뻘 산객들의 따듯한 정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정상 한편의 목조 벤치에 걸터앉은 우리는 먹기 좋게 손질해 온 복숭아와 포도를 나눠 먹으며 다음 코스를 살폈다. 어의곡탐방지원센터부터 비로봉까지는 5.1㎞였고, 하룻밤 쉬어 갈 제2연화봉대피소까지는 7.3㎞가 남았다. 들머리인 어의곡탐방지원센터부터 날머리인 죽령탐방지원센터까지 총거리는 17㎞다. 쉽지 않은 거리지만 소백산의 등산로는 가파르지 않고 유순하기에 큰 무리는 없다. 초록을 가로지르는 오솔길 너머 저 멀리 제1연화봉과 연화봉, 제2연화봉대피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백산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아, 아빠. 힘들 줄만 알았는데, 여름에 오르는 산도 꽤 괜찮네! 햇볕은 좀 뜨겁지만, 바람은 시원해서 좋아. 풍경도 예쁘고!” 난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밤마다 에어컨 도움 없이 잠들기가 힘들었잖아? 오늘 밤 우리가 쉬어갈 대피소는 한여름에 에어컨 없이도 시원하대! 아니, 추울지도 몰라. 진짜배기 피서인 셈이지. 아, 피서란 더위를 피한다는 뜻이야.”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엔 별이 잘 보일 것 같네. 우리 오늘은 시원한 밤공기 쐬며 오랜만에 별자리 찾아볼까?” 아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오늘 밤엔 별자리도 보고, 내일 아침엔 일출도 보자!” 우린 기대에 찬 걸음으로 제1연화봉을 향했다.

글∙사진 박준형 작가

평일에는 세종시와 여의도를 오가며 밥벌이를,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배낭을 메고 전국의 산과 섬을 누비고 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자연으로 한 걸음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책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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