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로드 미라클’: 굴레를 벗어던지니 길이 열렸다[유레카 모멘트]
그래 이거야! 풀리지 않는 과제,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 끝이 보이지 않는 역경을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솟아나는 상쾌한 아이디어.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한 모금 청량음료 같은 ‘유레카 모멘트’를 소개합니다.
“(운전) 초보자도 알 수 있게 대책을 가져오라고!”
2011년 3월 어느 날 한국도로공사 수도권본부(현 서울경기본부) 군포지사 상황실. 군포지사 관할 서해안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서 화물차 운전자가 숨지는 교통사고가 났다. 짧은 구간, 4차로에서 왼쪽 강릉 방향 길을 타려던 화물차와 1차로에서 목포 방향 오른쪽 길로 빠지려던 승용차가 나란히 달리게 됐다. ‘실랑이’ 끝에 승용차가 겨우 추월해 빠져나간 순간 화물차는 콘크리트 벽체에 부딪혔다. 도로 방향 표시가 더 명확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고였다.
폐쇄회로(CC)TV 녹화 영상으로 이 장면을 지켜본 지사장이 도로 담당 윤석덕 과장(현 차장·54)에게 예방책을 주문한 것이다. 건국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입사 15년차 윤 과장은 내심 황당했다. 물론 숨진 운전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다. 그렇다고 대뜸 삼척동자도 알만한 방안을 내놓으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지시라니….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오기와 약간의 반발심으로 “알겠습니다” 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 화두
윤 과장의 터덜터덜한 퇴근길은 2년 가까이 품고 있던 화두(話頭) 때문이기도 했다. 2009년 인천지사에 근무할 때였다. 경기 화성시 동탄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인재개발원에서 교육을 받고 인천 계양구에 있는 지사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운전하던 차가 군포시 둔대분기점을 막 지났다. 잠시 딴생각을 했나 싶었는데 차는 인천 방향이 아니라 목포 방향으로 들어서 버렸다. 화들짝 놀랐다. 베테랑 운전자라고 자부했는데 길을 놓친 것이다. 전방 주시 의무에 태만했나 자책하면서도 도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머릿속에 넣어 두고 고심하면 언젠가 해결책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듬해 군포지사로 발령이 난 뒤에도 뚜렷한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가 곧 흐지부지해졌다. 대략 이런 것들이다. 분기점 앞에 표지판을 세워서 알린다. 발광다이오드(LED)로 번쩍번쩍하게 만든 큰 화살표로 왼쪽 또는 오른쪽 길을 택하게 한다. 경찰차 지붕에 달린 경광등처럼 깜빡깜빡하는 조명으로 경각심을 준다. 차선에 돌출하는 시설물을 붙여 차가 밟으면 운전자가 주의를 환기할 수 있도록 만든다.
“도로에 표지판 같은 것이 높은 데 여러 개 있으면 사람들이 잘 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오히려 운전자가 피곤해서 잘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높이 있고, 여러 개 있으면 더 안 본다는 얘기입니다.”
● 굴레
거실에서 초등학교 1학년 딸내미와 유치원생 아들은 바빠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고개만 들어 “아빠 왔어요?” 하고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물감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8세 딸아이는 컬러링북 같은 데에 밑그림 된 인형들 옷을 색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네 살배기 아들은 누나의 그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해 짜증이 난 듯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동그라미를 북북 그려댔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윤 과장은 그 자리에 서서 그림에 몰두한 남매를 지긋이 바라봤다. 아빠 오실 때까지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는 아내에게는 그가 해탈한 것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우연이었을까. 그 순간, 지사장의 “초보자도 알 수 있게”라는 지시가 머릿속에서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로 바뀌었다. 딸은 초등학생, 아들은 유치원생. ‘쟤들이 알 수 있다면….’ 두근거렸다. ‘쟤들이 알 수 있는 것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자. 그리면 되지 않겠는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다. 도로 기술자 윤 과장이 그동안 떠올린 대책은 기존 행태나 기술에 제한돼 있었다. ‘입체적 구조물을 사람들 눈에 띄도록 세워 놓는다’는 틀에 갇혀 있었다. 토목공학 전공자라는 굴레에 속박돼 있었다. 아이들은 그에게 스스로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힌트를 줬다. 운전하면서 사람들은 전방 노면을 자연스럽게 주시할 터였다.
앞뒤 가릴 것 없었다. 이튿날 아침 지사장이 출근하기도 전에 지사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불명확한 지시를 받고도 하룻밤 새 기막힌 대책을 만들어 왔으니 보십시오.’ 벌써 우쭐했다. 도로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이른바 ‘분기점 방향 유도 컬러 레인(lane)’을 그리겠다고 보고했다. 지사장은 망설임이 없었다. “한번 해볼까? 좋아, 해보자.” 윤 과장이 “자칫하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 신중하게 가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지사장이 한다면 하는 거야”라고 힘줘 말했다. 지사장이 사무직이 아니라 토목직 출신이었어도 ‘토목직의 룰(rule)’을 깨면서까지 밀어붙이라고 했을까. 아니었을 터다. 지사장은 유레카의 순간에 첫 번째 문을 열어 준 귀인이었다.
● 난관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큰일이 날 수 있는 도로를 관리, 규제하는 도로교통법은 ‘센 법’이다. 그만큼 센 법이 규정한 도로에 칠할 수 있는 색깔은 흰색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뿐이었다. 다른 색을 칠하면 불법이다. 오른쪽 유도선(線)은 주황색, 왼쪽은 초록색을 구상한 윤 과장에게 닥친 첫 난관이었다.
주변 전문가나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하자 “함부로 그렇게 색을 칠하게 되면 혼란을 준다. 정해진 색 외에는 (길에) 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정도는 점잖은 편이었다. “봐봐. 윤 과장이 칠한 선 따라가다가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윤 과장이 (배상금) 물어줄 거야? 아니면 보험사에서 (피해자 유족에게) 보험금 주고 너한테 구상권을 청구할 텐데 한두 푼이겠어? 월급으로 되겠어? 나 같으면 절대 안 한다.”
불법적인 색깔로 선을 그렸다가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가거나 적어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걱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떻게 보면 멍청해 보이는 애들 생각을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생사가 달린 도로에 집어넣었다가 큰 창피를 당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칠하는 비용보다 지우는 비용이 두 배 이상 든다는 것도 압박이었다. 칠한 선에 문제가 생겨서 지우려면 윤 과장 개인 돈으로라도 지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반반씩 부담하자”고 북돋워 준 지사장이 고맙기만 했다.
사실상 불법인 일인 데다 경찰청 협조(승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난관이었다. 고속도로 전체가 아니라 군포지사가 안산분기점 부근 총연장 1.5km를 칠하는 한시적인 목적의 시범 설치여서 관할 구역 경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고속도로 유지와 관리는 한국도로공사가 하지만 교통 관리는 고속도로순찰대와 공동으로 한다. 사망사고는 양측 모두 책임을 지고 개선해야 하는 문제다.
윤 과장은 ‘교통사고를 줄여 인명피해를 줄이고 싶다’는 심정을 공유하는 경찰이라면 자신의 구상을 이해하고 호응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찾은 사람이 인천경찰청 11지구대 임용훈 경사(현 경감)였다. 윤 과장이 말했다. “(이건) 불법이다. 그런데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해보고 싶다. 도와달라.” 임 경사가 ‘쿨하게’ 답했다. “괜찮은데요. 사람 살리는데 뭐 한번 해봅시다.”
임 경사는 당시 지구대장에게 승인을 요청하면서 적극행정 면책제도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공무원이 직무를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분적인 절차상 하자 등을 이유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규정 이외 색깔로 선을 길게 칠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인명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명분에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승인은 떨어졌다. 임 경사는 유레카의 순간에 두 번째 문을 열어준 귀인이었다.
지사장의 허락과 응원을 받고 해당 도로 관할 고속도로순찰대 승인이 떨어진 뒤에도 윤 과장은 찜찜했다. 주황색 말고 다른 색으로 칠하고 싶었다. 핑크색이었다. 핑크색으로 하자고 하면 맛이 간 사람 취급을 받을 공산이 컸다. 그래도 핑크였다. 도로에 색을 칠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색칠 작업을 맡은 고속도로 시설물 유지·보수 업체 소장에게 하소연했다.
“소장님, 초록색은 ‘녹색 고속도로’ ‘푸른 고속도로’라고들 호응하니까 칠할 만합니다. 반대가 없어요. 하지만 주황색은 중앙분리선 같이 규제 의미가 강해서 저는 별로예요. 핑크색을 칠하고 싶은데 ‘또라이(괴짜를 뜻하는 비속어)’라고, 미친놈이라고 남들이 생각할 것 같아요.”
소장이 말했다. “과장님. 어차피 도로에 색칠한다는 것 자체가 튀는 생각이어서 다들 또라이라고 할 겁니다. 어차피 또라이 소리 들을 거면 ‘상(완벽한)또라이’가 되세요. 그러니까 핑크색으로 갑시다.” 유레카의 순간에 세 번째 문을 열어 준 귀인은 이 소장님이었다.
● 확산
2011년 5월 초 안산분기점에 그린 초록색과 핑크색 유도선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린 후 6개월간 해당 구역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3건뿐이었다. 이전 6개월 동안에는 25건이었다. 분석 결과 사고 저감률이 70~80%나 됐다.
고무된 윤 과장은 색깔 유도선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한국도로공사 본사 승인이 필요했다. 먼저 서울경기본부 창안 소그룹(CoP) 혁신 발명 과제 발표회에 출품했다. ‘혁명적인 결과’라는 평가 속에 3등 장려상을 받고 본사 발표회 출품 자격을 얻었다. 본사 발표회에서는 기각됐다. 가장 큰 결격 사유는 법률 위반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줄였다는 성과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다른 지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꿩 잡는 게 매’라고 불법 여부와 상관없이 색깔 유도선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먼저 시작한 군포지사 윤 과장에게 있다는 ‘면죄부’까지 있었다.
이듬해 정말로 판교분기점에 분당 방향 핑크색 유도선이 그려졌다. 안산분기점보다 교통량이 월등히 많은 판교분기점을 지나면서 이를 본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그렇게 몇몇 지사에서 그리기 시작하더니 2014년쯤에는 열 몇 곳으로 늘었다.
본사는 답답했다. 분명히 불법인데 자꾸 늘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본사 교통처는 그해 고속도로에서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정했다. 졸음 쉼터로 유도하는 선은 연두색으로 한다는 내용만 추가했다. ‘카더라 통신(소문)’이 돌았다. 경찰청이 펄펄 뛰면서 “도로에 자꾸 칠을 하면 한국도로공사 담당자를 잡아가겠다”고 했다는 얘기였다. 확인되지는 않았다.
더욱 답답해진 쪽은 도로관리청인 국토교통부였다. 결국 2016년 말에 합법화 사전 정지 작업에 들어갔다. 교통공학으로 권위가 있는 아주대에 노면 색깔 유도선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를 토대로 2017년 12월 ‘노면 색깔 유도선 설치 매뉴얼’을 발표해 고속도로뿐 아니라 전국 도로 어디든지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2021년 4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최종적으로 합법이 됐다. 안산분기점 고속도로에 처음 색을 칠한 지 10년 만이었다. 윤 과장조차 이렇게 빨리 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성공이었다.
● 도전
올 3월 윤 차장이 파견 근무 중인 아프리카 모리셔스에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찾아왔다. 현지 기술자들과 함께 수행하는 교통 혼잡 완화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로 마지막 교량을 개통했을 때였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군포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색깔 유도선을 창안한 윤 차장을 들었다고 한다. 아들 친구들이 “얘네 아빠예요”라고 하자 그 선생님은 “너희 아빠셨구나. 난 그 분을 존경한단다”라고 했다. 아들이 말했다. “선생님이 존경하는 아빠가 있어 자랑스럽다”고. 윤 차장은 뭉클했다.
윤 차장은 모리셔스에도 색깔 유도선을 그리고 싶다. 그러나 이곳 경찰도, 도로청도, 교통공단도 모두 거부했다. 거부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관련 법이나 규정이 없고, 책임 문제도 따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노면 색깔 유도선 ‘2호 나라’로 만들 수 있게 고군분투할 마음이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유형지표(MBTI)로 윤 차장은 ENTP다. 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 인터넷 사이트 해석으로는 ‘별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보다, 순종하며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돈키호테일지 모른다. 아프리카 대륙 남동쪽 150km 정도 떨어진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그는 때때로 읊는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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