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건강도, 태아 생명도 위태"…낙태죄 폐지 공백 현실적 대안은
'오프라벨 처방' 의료 문턱 낮춰야…임신중지·유도분만 원리 같아
[편집자주] "대한민국에서 임신 중지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과연 그럴까. 의료계는 여전히 임신 중지 수술에 소극적이며, 일부는 진료조차 거부한다. 각자도생에 내몰린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정체불명의 판매자를 만나 임신 중지 약물 '미프진'을 구매한다. 가짜 약인지, 진짜 약인지 확인이 어렵지만 지름 1㎝의 알약을 입안에 털어 꾸역꾸역 삼킨다. 정부와 국회는 뒷짐 진 채 여성들의 '목숨 건 임신 중단'을 관망 중이다. 뉴스1은 지난 2개월간 전국 산부인과 300여 곳을 전수 조사하고, 전국 곳곳에 있는 미프진 판매자들과 구매자 여성들을 직접 만나 대한민국 임신 중지 실태를 심층 분석했다.
(서울=뉴스1) 김예원 서상혁 홍유진 장성희 기자 = "임신부의 건강도, 태아의 생명도 모두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낙태죄 폐지 이후 5년간 이어진 입법 공백이 만들어낸 현주소는 이렇게 요약된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정부와 국회가 뒷짐 지는 동안 임신 중지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여 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미프진 불법 거래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앞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당장 임신 중지(낙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만큼 엄마와 태아 모두 위태로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과도기적 대안이라도 마련하자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프라벨'(허가 외 사용) 임신중절 약 처방을 활성화하고 피임부터 임신 중지 또는 양육까지 '원스톱' 창구를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꼽힌다.
◇국회 문턱 넘지 못한 대체 입법안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를 두고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태아는 임신 22주 내외부터 독자적 생존이 가능하다는 의학계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임신 22주 내에서 임신 중절과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라는 의견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헌재 판결 후 정부와 21대 국회는 앞다퉈 대체 입법안을 내놨다. 당시 야당(국민의힘) 소속이었던 조해진 전 의원은 6주(2020년 10월), 서정숙 전 의원은 10주(2020년 12월), 정부(2020년 11월)는 14주 내 임신에 한해서만 중절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권인숙(2020년 10월), 박주민 의원(2020년 11월)과 정의당 소속 이은주 전 의원(2020년 10월)은 낙태죄 전면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21대 국회의 입법 움직임은 배아 및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는 종교계의 여론을 어느 정도 고려해 일부 주수라도 안전한 중절을 할 수 있게끔 '타협'하자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임신 사유와 주수를 기준으로 임신 중지의 합법 여부가 결정되면 또 다른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수치심에 범죄 사실을 숨겨 합법적 임신 중절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설령 범죄 피해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입증에 시간이 걸려 합법적 임신 중지 가능 기한을 넘길 수 있어서다.
중절 허용 기준 주수가 제각기 다른 점도 넘어야 할 산이다. 일례로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임신 10주 이내의 임신 중지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살인죄가 인정된 과거 판례를 기준으로 임신 28주 이상이면 수술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계는 사각지대를 우려해 '주수 적용'을 전제로 한 합법화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안 무엇일까
임신 중단을 둘러싼 논의가 제자리걸음 하는 만큼 '현실'을 고려한 과도기적 대안이라도 실행하자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미프지미소정(미프진) 구성품 중 하나인 미소프로스톨의 '오프라벨'(허가 외 사용) 활성화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의료기관 또는 의료인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허가를 받으면 식약처 승인 외 치료 목적으로 특정 약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미소프로스톨은 위궤양 치료 등 일부 목적에 한해 국내 사용이 허가됐지만 자궁 수축에 효과적이라 자연 유산과 분만 유도에도 쓰인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미페프리스톤과 더불어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할 만큼 성공률과 안전성도 높다.
국제기구에서는 유산이나 임신 중지 구분 없이 미소프로스톨 가이드라인을 통합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만일 미프진을 당장 도입하기 힘들다면 의료 현장에서 널리 쓰이는 일부 약물의 오프라벨 처방이라도 활성화해 안전한 임신 중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프진을 음지에서 거래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약물을 사용한 임신 중지를 해외처럼 정상적 의료 서비스의 범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입법 공백 상황에선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이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지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미프진이 WHO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될 정도로 의료진의 적극적 개입 없이 국제적으로 안전함을 검증받은 약물이고 주수 10주까지는 성공률이 95% 이상 달하는 효과가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궁극적으로는 국내에서 미프진의 도입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부터 병원에 입원한 임신부에 한해 미프진 처방을 합법화했다. 한국이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 뉴질랜드 '디사이드' 벤치마킹 검토 필요
임신한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해도 건강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원스톱' 정보 창구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디사이드(DECIDE)'가 대표적 모범 사례다.
출산 후 입양 및 양육, 임신 중지 등 여러 선택지 및 지원을 비슷한 정보량으로 안내하는 것이 디사이드의 핵심이다. 또 16가지 자가 설문지 및 상담 지원을 통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상황에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캐나다 등 다른 해외 국가에서도 인근 의료 기관의 임신 중지 지원 여부를 알려주는 사이트를 운영해 정보를 공식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러브 플랜'이라는 사이트가 있지만 정보가 빈약하다. 임신 시 주의 사항 등 출산을 염두에 둔 정보가 '임산부 약물 복용' 아래 6개 코너에 걸쳐 상세히 소개돼 있기는 하다. 반면 임신 중지 관련 정보는 '성 건강 정보'의 '위기 임신' 한 코너에서만 다뤄 정보의 한계가 뚜렷하다.
임신 중지가 아닌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려면 정부의 출산·양육 지원이 더욱 세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지원받는 복지시설에 있는 미혼모들에 한해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설 밖 한 부모'는 각종 지원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미혼모는 출산과 임신 중지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거듭하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라며 "요즘 한부모 가정들은 사생활 보호, 가족과의 교류를 중시해 시설 입소보다는 본인이 살던 지역사회에서 출산하거나 양육하는 걸 선호한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지원 방식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등 해외처럼 체계적 지원을 하려면 담당 부처 일원화 등 '원스톱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피임·임신·출산·양육 등 개인의 성·재생산과 관련된 권리는 단계별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어 포괄적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미혼모 등 한 부모 과정 지원 사업의 주 소관 부처는 여성가족부지다. 그러나 임신 출산·양육 등 재생산 권리에 대한 전반적 지원은 보건복지부가 전담하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이 최종 선택 전 수십, 수백 번씩 임신 중지와 출산의 갈림길에 서는 만큼 이 모든 체계를 통합 지원할 수 있는 담당 부서 및 부처가 절실한다는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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