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매화에 물은 주었느냐?"

도광환 2024. 8.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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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사군자 중 가장 앞서 나오는 매화에 대한 우리 선인들 예찬은 각별했다.

탐스러운 자태, 은은한 향기, 매실의 유용성, 봄을 알리는 전령 역할 등 여러 이유로 매화를 존숭하고 탐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매화를 피운 그림이 매우 많은 것을 보면, 매화는 가히 '동아시아 꽃'이라고 부를 만하다.

조선과 현대 여러 화가가 그린 매화 그림을 통해 꽃향기에 흠뻑 빠져 보자.

천재 화가인 김홍도도 매화를 많이 그렸다. 발군은 '백매도(白梅圖)'다.

직선으로 자라지 않는 매화나무 특성을 살려 그린 고목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 위에 앉은 매화는 탐스럽기보단 부끄러운 듯한 예민함이다. 작은 점을 찍듯이 그린 꽃송이는 피울까 말까 하는 '주저'로 감지된다. 이런 경우 적합한 우리말은 '갸륵하다'일 것이다.

'백매도(白梅圖)' 간송미술관 소장

19세기 화가 조희룡(1789~1866)은 '매화 화가'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매화를 여러 모습으로 60여 점 그렸다.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자각적 심미의 대상으로 꽃 핀 매화나무를 바라봤다"(이인숙, '옛 그림 예찬')는 평이 흔쾌히 와 닿는다.

대표작, '붉은 매화 흰 매화(紅白梅圖)' 8폭 병풍은 어떤 매화 작품보다 세련된 조형미를 자랑한다. 구불거리며 솟구치는 두 그루 매화는 용의 승천 같고, 붉음과 하양 조화는 따사로운 봄기운 분말 같다.

'붉은 매화 흰 매화(紅白梅圖)' 8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의 다른 작품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도 자주 언급된다. 매림(梅林)을 가꾸며 집을 짓고 학과 함께 살았다는 송나라 임포(967~1028)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겨울과 봄 경계에서 홀로 글 읽는 선비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간송미술관 소장

'매화서옥도'와 제목이 비슷한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는 29세로 요절한 천재 화가 전기(1825~1854) 대표작으로 두 그림을 같이 놓고 감상하기 제격이다.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색 조화 덕에 눈에 쏙 박히는 그림이다. 눈발 날리듯이 점점이 뿌려진 매화는 봄의 운치를 풍미 있게 한다. 수십 그루가 한데 모여 있는 매화나무 숲은 순도 높은 봄을 호명하고 있다.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문이 열린 초옥에 앉아 피리 부는 선비는 집주인인 역관 오경석(1831~1879)이며, 빨간 옷에 가야금을 메고 다리를 건너는 이는 화가 자신이라고 한다. 봄 그늘에 두 사람은 매화 향기보다 더 짙은 우정을 나눌 것이다.

기존 양식을 파괴하며 웅장함과 자유분방함으로 화단을 놀라게 한 대작은 고종 때 기인 화가 장승업(1843~1897)이 그린 '붉은 매화 흰 매화' (紅白梅圖)' 10폭 병풍이다.

4m나 되는 병풍에 밑동은 자르고 매화가 활짝 핀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기성 작품에 비하면 파격이며, 도전이고, 변화무쌍한 자유다. 조희룡 그림을 한 단계 숙성시킨 듯하다. 장승업 특유의 호방한 기운이 서렸다.

'붉은 매화와 흰 매화' (紅白梅圖)' 10폭 병풍 개인 소장

현대화가 문봉선(1961~)도 매화에 탐닉한다. 제주 출신인 그가 우연히 선암사 홍매화를 접하곤 매화에 반해 전국을 돌며 한지에 매화를 심었다.

그의 작품엔 향기뿐 아니라 빛이 있다. 남도 지방 특유의 담담한 빛이다. '매소명월(梅梢明月)' 제목의 작품엔 달빛과 공명하는 매화를 그렸다. 보름달은 시간을 알려주는 매재(媒材)가 아니다. 세월을 이겨낸 '승화'로서의 빛이다.

문 작가는 자신이 그린 나무 그림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나무는 만 그루를 그린 뒤 얻은 자연스러운 붓질입니다"

그의 말처럼, 수없는 시도 끝에 달성한 고목에 결기 있는 붓질이 보이는 듯하며, 고목 사이로 남긴 여백엔 달빛이 배양되는 듯하다.

'매소명월(梅梢明月)' 작가 소장

최지윤(1962~)은 꽃과 동물의 조화로운 감수성을 그리는 화가다. 그녀가 유독 사랑하는 꽃이 매화다. '남성 선비'로 한정돼 온 탐매(探梅) 세계에서 보란 듯이 드러낸 그녀 메시지는 '아름다운 관계성'이다.

'사랑하놋다 2303'(2023)을 보면 매화와 비둘기가 서로를 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도래할 것을 염원하며 그린 작품으로 '사랑과 연대'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그녀 작품들은 생명 공존을 이야기하는데, 사랑이 변치 않기 위해선 '함께'이어야 함을 일깨운다.

'사랑하놋다 2303' 작가 소장

"매화에 물은 주었느냐?"

누구보다 매화를 사랑한 퇴계 이황(1501~1570)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단지 매화이고 물일까? 생명엔 물과 빛과 기(氣)가 필수적이다. 매화가 결실이라면, 물과 빛과 기는 근원이다. 이 시간 우리에게 무엇이 매화이며, 무엇이 물과 빛과 기인지 물어봐야 한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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