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광 김일성의 제2남침, 마오쩌둥이 불허하자 대남 테러 자행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4회>
북한에선 “민족의 태양”이나 “어버이 수령”으로 통하는 김일성(1912-1994, 본명 김성주)은 한평생 평화 쇼를 벌인 전쟁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을 몰고서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공산권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의 개전 허락과 마오쩌둥의 참전 언약 위에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발발의 직접 책임은 김일성 본인에게 있었다.
만약 전쟁 중 유엔군에 생포됐더라면, 일제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처럼, 김일성 역시 국제 군사재판소에 제소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 당했을 특급 전범이었다. 중국의 도움으로 권좌를 유지한 김일성은 휴전 후에도 쉴 새 없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테러를 기획하고 자행했다. 1975년 인도차이나의 정세를 지켜보던 김일성은 드디어 “공산 혁명의 만조기(滿潮期)”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제2남침의 기회를 노린 김일성은 사이공 함락이 임박한 시점에 마오쩌둥을 알현하려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1975년 제2의 남침을 계획한 김일성
1975년 3월부터 시작된 북베트남의 총력전은 남베트남을 소생 불능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4월 17일 캄보디아에선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Khmer Rouge) 세력이 수도 프놈펜을 정복했고, 4월 30일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됐다. 잔뜩 고무된 김일성은 1975년 4월 18일~26일 베이징을 공식 방문했다. 마오쩌둥에게 대남 침략의 의사를 밝히고 중국의 군사적·외교적 지지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중국 측은 방중한 김일성을 최고의 외교적 프로토콜로 환영했다. 중소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김일성을 중국 편에 꼭 묶어두기 위한 외교 전술이었다. 중공 중앙은 “김일성이 한국의 평화적·독립적 재통일을 위한 올바른 노선을 정립했으며,” 북한 정권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법을 계속 제시했다”고 칭송했다. 아울러 중국은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라”는 북한의 요구에 동의하며, “두 개의 한국을 만들려는 박정희 도당의 정책을 비난한다”며 북한 편을 들어 주었다.
중소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북한을 중국 측에 묶어둬야 한다는 계산속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러한 중국 측의 찬사에 득의양양해진 김일성이었지만 중국과 더불어 소련을 규탄하기는 꺼렸다. 결국 중국의 관영매체는 “조선노동당과 (북한의) 정부와 인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제국주의(미국)와 현대 수정주의(소련)와 견결하게 투쟁하고 있다” 정도의 기사를 내보냈다.
4월 19일 베이징의 공식 석상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인민의 투쟁이 가열되면서 제국주의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면서 말했다.
“우리 인민이 지금도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전개하는 작금의 투쟁은 전 지구적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체인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같은 나라의 성원으로서 우리는 그저 팔짱만 끼고 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민중을 힘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적대세력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더욱 견결하게 응전하여 침략자를 완전히 깨부술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 "
1975년 국제정세에서 이 발언은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의 내란 활동에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회)이 부응해서 반미투쟁을 전개한 베트남식 통일 전술을 남한의 적화에 적용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지 표명이라 해석될 수 있다. 다시금 남한에 과거의 남로당 같은 조직이 생겨나 혁명 투쟁을 전개한다면 다시 그 세력과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발상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은 노골적으로 남한 정치에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만약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고, 남조선 인민이 열망하듯이 민족의식을 가진 민주적 인사가 권력을 잡게 되면 우리는 한반도에서 영구 평화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성공적으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냉전 시대 관련 중국의 석학 선즈화(沈志華)의 분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조선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여 통일전쟁을 벌이겠다며 개전(開戰)에 대한 마오쩌둥의 허락을 구했다. 김일성은 베트남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바로 그때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적화할 수 있는 최적 타이밍임을 강조했다.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라는 김일성의 확신 어린 한 마디에 그의 전쟁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Shen Zhihua, A Misunderstood Relationship, Columbia Univ. Press, 2020; 沈志華, ‘最後的天朝,’ 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18)
그 점에 관해선 당시 동독의 해석도 대략 일치한다. 1979년 4월 29일 동독 외교부는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한 목적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번 방문에서 북한의 주된 관심은 남한에 대한 앞으로의 정책을 중국과 조율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지표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가 인도차이나의 상황에 근거하여 미국이 압박에 시달리다 주한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 평가했던 듯하다. 베이징에서의 첫 공식 석상에서 김일성은 그러한 생각에 따라서 남한의 해방에 관해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냈다. 우선 그는 남한에서 주한 미군 철수에 관해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그는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종식할 것과 외적 간섭 없는 평화적 통일의 선제 조건으로 남한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서둘러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인이 잃을 것은 휴전선이고, 얻을 것은 통일이라’ 했다.” (East German Documents on Kim Il Sung’s Trip to Beijing in April, 1975)
중국의 대표적 학자 선즈화와 1975년 동독 외교관의 해석에 따르면 1975년 4월 베이징을 찾아온 김일성은 자신이 평양에서 작성한 제2남침 계획서를 들고서 마오쩌둥의 재가를 앙망하고 있었다. 몹시 들뜬 상태에서 김일성은 “조국 통일”을 위한 제2의 침략 전쟁을 허락해 달라 읍소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포기시킨 마오쩌둥
1975년 당시 이미 늙고 병든 마오쩌둥은 열일곱 살 어린 예순세 살 김일성의 간절한 부탁을 넌지시 뿌리쳤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한반도 무력 통일 가능성과 중국의 지원을 강조하는 김일성을 몸에 병이 있다며 덩샤오핑에게 떠넘겼다. 덩샤오핑은 김일성과 4차례의 공식 대담을 가졌지만, 그의 완곡어법에 숨겨진 중국 측의 의도는 명백했다.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중국은 절대로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950년 마오쩌둥이 김일성을 멸망의 늪에서 건져 준 지 2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전쟁의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항미원조란 일제를 원폭으로 멸망시킨 인류 최강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함께 공산 혁명의 길을 가는 어린 동생 같은 조선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항미원조” 전쟁의 결과 중국은 9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야 했지만 소련을 따돌리고 한반도 북쪽 절반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의 피로 지킨 김일성의 조선은 그때부터 소련보단 오히려 중국의 ‘리틀 브라더(little brother)’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4월 김일성이 베이징에 달려가서 대남 침략을 허락해 달라 간청했던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전통적 중화 질서 속에서 조공국은 자국의 중대사에 대해선 천조(天朝)에 사전 보고하고, 사후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걸쳐야 했다. 김일성이 베이징에 달려가서 대남 침략의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구했던 점도 그런 맥락이었다.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민족해방과 자주노선을 금과옥조로 삼는 북한은 실제로 중국의 위성국일 뿐이었다.
중국의 반대 의사를 확인한 김일성은 일단 전쟁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대남 적화 야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2개월 후 (1975년 6월 2~5일)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지프코프(Todor Zhivkov, 1911-1998)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김일성은 마치 딴사람처럼 평화의 사설을 읊어댔다. 이 점에 관해서 김일성의 선의를 신뢰하는 한 연구자는 베이징에서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설파하던 이유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 이후 주한 미군의 병력 증강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신종대,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 시 김일성의 북경 방문,” 동아연구 제39권 1호: 221-244). 물론 그러한 주장은 일말의 설득력도 없다. 지프코프와의 대화에서 김일성은 스스로 “남조선” 내부의 반체제 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체제 전복을 획책하고 있다고 실토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실토, 북한이 남한 내 반체제 혁명 세력을 지도
김일성은 지프코프에게 “서방 언론들이 우리가 베트남 승리에 고무되어 남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면서 베이징에서 방방 뜰 때와는 정반대로 미국이 오히려 북한에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김일성은 북한이 당시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민당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사회주의 성향의 반체제적 지하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남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의) 신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민주통일당 및 사회민주당과 함께 조국 통일의 인민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도 인민전선의 구성원들로서 민주화와 조국 통일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 대다수는 중산층의 대표들로서 노동자·농민과의 유대나 그들에 대한 영향력도 약하다. 남조선의 마르크스주의 당인 통일혁명당은 불과 3,000명의 당원밖에 없어 수적으로 아직 취약하다. 그들은 중앙 지휘부가 있고, 지방에도 중앙집권적 지도부 조직이 구축되어 있다. 또 여러 공장에 대표들이 있지만, 그들 조직은 불법이며, 그들의 활동은 온전치 못하다. 노동자·농민 사이에서 적극적 활동을 벌이거나 박정희 정권에 대항해 공개적으로 투쟁하면 조직의 영도자들이 숙청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혁명당의 당원들에게 합법적인 야당의 대오에 들어가서 노동자·농민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라 조언하고 있다.” (June 18, 1975 Information on the Talks between Kim Il Sung and Todor Zhivkov).
이 중대한 발언은 1970년대 이미 대한민국 내부에 북한의 지시를 받는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지하 정당의 형태로 암약하고 있었다는 북한의 “어버이 수령” 김일성 자신의 증언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 지식계와 대학가에 민족해방(NL) 계열의 소위 “주체사상파”가 독버섯처럼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이념적 토양이 이미 1970년대 북한과의 직접적 연계 위에서 배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0~80년대 김일성의 대남 도발
김일성과 지프코프의 이 회담은 박정희가 흉탄에 쓰러지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김일성은 이미 대남 침략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남한의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김일성은 대규모의 본격적인 군사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꾸준히 군사 테러를 일으켰다. 1968년 한 해에만 청와대 습격 사건,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스물두 살의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총탄을 난사해 부인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구동독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4년 10월 25일 김일성은 그 책임을 재일교포 민단 계열의 김대중 추종자들에게 돌렸지만, 2002년 5월 13일 방북한 박근혜를 만난 김정일은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말로써 북한의 책임을 에둘러 시인했다).
1976년 8월 18일엔 미국인 유엔군 장교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1980년대가 열리면서 김일성의 군사 테러는 더더욱 잔악무도한 군사 테러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83년 김일성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 17명을 살해하는 군사 테러를 사주했다.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아까운 인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최종 책임자 역시 김일성이었다.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 김일성은 제2남침 계획서를 들고 베이징으로 달려갔지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전쟁 도발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남한 내 사회주의 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남조선 혁명”을 일으키는 우회적인 대남 적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 선전부는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격려·고무했다. 남한의 반체제 혁명 세력과의 적극적 연계를 노렸던 김일성은 1983년 아웅산에서, 다시 1987년 미얀마 상공에서 대규모 인명을 학살하는 군사 테러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대남 적화 전략을 따라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는 주사파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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