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의 맛·탐욕의 향 가득한 향신료 쟁탈전

김신성 2024. 8. 3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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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정향·후추 같은 향신료
진귀한 기호식품이자 최대 투자처
유럽 열강 말루쿠제도 두고 각축전
바닷길 개척·주식회사의 탄생 등
착취 ·다툼 역사 드라마틱하게 구성

향신료 전쟁 - 세계화, 제국주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향신료 탐욕사/ 최광용/ 한겨레출판사/ 2만원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회사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전 세계 곳곳에 기지를 두고 수백만 명을 고용한 방대한 조직이었는데, 전성기 시가총액을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무려 8조3000억달러에 달한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합치면 6조4000억달러(2024년 8월 기준)이므로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1800년에 돌연 파산을 선언하고 해체되었다. 2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이 막강한 기업이 무너진 원인은 무엇보다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향신료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 유럽에서 정향, 육두구, 후추, 시나몬 같은 향신료는 몹시 진귀한 기호품이었다. 따라서 향신료 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셈. 후추 한 알이 진주 한 알보다 비쌌다. 투자자들에게 수십, 수백 배의 수익을 안겨 줬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정향과 육두구는 오직 인도네시아반도에 위치한 말루쿠제도(스파이스제도)에서만 생산되었다. 이 교역로를 확보하고 나아가 이 지역 자체를 차지하는 자가 막대한 부와 해상 패권을 쥘 수 있었다.
최초의 영국령이 된 런섬의 아름다운 전경.
향신료 전쟁이란 말루쿠제도를 두고 벌인 유럽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전을 말한다. 책은 향신료를 둘러싼 문화, 경제, 사회, 정치, 전쟁, 모험의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구성해 낸다. 스파이스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럽 열강의 처절한 아귀다툼과 그로 인해 삶의 터전과 목숨을 빼앗기고 착취당한 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더불어 향신료 도둑 푸아브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던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향신료 상인 랠프 피치, 시나몬과 카시아의 차이, 세계 3대 향으로 꼽히는 용연향·사향·침향의 특징 등 알아두면 유익한 정보들을 담았다.
향신료 전쟁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3가지 변곡점을 낳았다. 첫째는 세계화의 길을 연 것이다. 유럽인들은 향신료의 산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후추와 시나몬이 인도에서 온다는 건 알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아시아 어딘가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향신료는 부르는 게 값일 만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이었다. 작은 가능성에도 기꺼이 투자할 상인과 귀족들, 도전을 피하지 않는 탐험가들, 일거리를 찾던 뱃사람들이 항해에 나섰다.
최광용/ 한겨레출판사/ 2만원
대항해 시대의 영웅들은 전 세계를 바닷길로 이어진 단일 무대로 만들었다. 스파이스제도의 정체를 가장 먼저 밝힌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말루쿠제도와 10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반다제도를 차지한 포르투갈은 정향과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위치와 항로를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뒤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말루쿠제도에 발을 디뎠다.

둘째는 주식회사의 탄생이다. 동인도회사의 설립은 글로벌 경제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1600년 런던의 상인과 모험가들은 보다 효과적인 항로 개척을 위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동인도제도로 선단을 보냈다. 엘리자베스 1세도 그들을 지원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항해가 끝나면 벌어들인 돈을 투자금에 따라 배당하고 정산을 끝내는 일종의 합자회사 형태였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성공에 자극을 받은 네덜란드도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다양한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막강한 자금력,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향신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때 네덜란드 상인들은 투자자들을 모집하면서 지분을 증명하는 문서를 나눠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주식의 효시다.
1684년에 제작된 뉴네덜란드 지도.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도 앞다퉈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이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앞서 나갔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57년에 합자회사 형태를 버리고 주식회사로 변모했다. 엄청난 투자금이 들어오자 회사의 역량은 크게 올라갔고 향신료뿐 아니라 비단, 면직물, 화약의 원료인 초석, 차, 아편 등 사업 품목과 시장을 다각화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기업은 생산과 판매를 독점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지만 이 전략은 위험하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는 내구력과 난관을 극복할 힘을 키우는데, 독점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외부적으로 취약해지기 십상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그랬다. 변화보다 안주를 택했다. 그로 인해 거대 조직에 차츰 내부 균열이 생겼고 부패, 비능률, 나태가 만연해져 결국 파산했다.

반면 영국은 세력이 약해진 네덜란드령 식민지를 공격해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했다. 1809년 영국은 말루쿠제도와 반다제도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향신료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됐다.

셋째는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유럽인들의 향신료 사랑은 아시아 국가들의 식민 지배라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 강국들의 항로 개척은 식민지 경쟁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인도회사의 주목적은 무역이었지만 실제로는 회사 영토 내에서 사법, 외교, 군사 활동의 권리를 가지고 식민지 경영에 집중했다. 사실상 총독부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들은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약탈과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향신료 전쟁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흉포를 여실히 보여 준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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