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담담한 문장, 깊은 울림… 가혹한 삶을 묵묵히 걷는 일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마냥 걷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푸른 들판을 걷다' 속 인물들도 내처 걷는다.
1999년 '남극'으로 데뷔한 키건은 아일랜드 교과서에도 작품이 수록돼 있을 만큼 자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선집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일랜드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낸 단편소설 7편이 수록됐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폭력-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담아내
◇푸른 들판을 걷다/클레어 키건 지음·허진 옮김/252쪽·1만6800원·다산책방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국내 출판계에서도 주목받았던 소설가 키건의 초창기 단편선이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세 번째로 소개되는 키건의 작품이다. 1999년 ‘남극’으로 데뷔한 키건은 아일랜드 교과서에도 작품이 수록돼 있을 만큼 자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4월, 11월 국내 번역 출간됐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주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 선집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일랜드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낸 단편소설 7편이 수록됐다.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여운을 남기는 특징은 여전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파고든다. 7편 중 6편이 아일랜드를 무대로 하는데,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남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암울하고 고단하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 가톨릭 사제인 주인공은 성직자라는 역할과 세속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다. ‘작별 선물’ 속 아버지는 아내의 묵인하에 어린 딸을 성적으로 학대한다. 그는 딸이 뉴욕으로 떠나는 날에는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작별 인사를 받는다. ‘삼림 관리인의 딸’에 등장하는 디건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고 오로지 자기 땅에 집착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4년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은 선집을 출간하며 “따뜻하고 심오한 장면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평했던 단편 ‘물가 가까이’도 실려 있다. 졸부 새아버지와 가난한 시골 농가 출신 엄마, 하버드대에 다니는 아들 간의 삼자대면이 언제든 툭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묘사된다. 아들은 시골 촌부로 평생 남편에게 매여 산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중간중간 떠올린다. 언젠가 할머니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다를 보러 갔는데, 남편이 약속시간에서 5분이 지났다는 이유로 차를 출발시켜 버렸다. 할머니는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세워야 했고, 자신을 버리고 가려 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교차되며 답답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수록된 단편들에 기승전결이 명확한 에피소드가 있는 건 아니다. 인물들은 대체로 우유부단하거나 연약하다. 현실을 뒤바꿀 만큼 강하지도 않다. 다만 걷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 자체가 메시지인 듯하다. 짧은 단편은 고작 16쪽에 불과하다.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볼 수 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거북목·일자목… 이 운동 따라하세요”[베스트 닥터의 베스트 건강법]
- 의협, 비대위 부결…전공의대표 “임현택 회장 사퇴해야”
- 종로5가역 인근도 땅 꺼짐…잇단 싱크홀·침하에 ‘도심 교통 혼잡’
- 입구까지 잠겨버린 日 지하철…태풍 산산이 휩쓴 자리 처참
- ‘물음표 컵’ 들고 檢 출석 조국 “이상직 난 몰라”
- 일요일, 수도권 폭염 완화…남부 무더위 지속
- 입금 문자 왔는데 돈은 없어…황당 ‘환불 사기’ 수법 (영상)
- 할리우드 방불케 하는 전당대회… 美 대선 판세 뒤흔드는 ★들[글로벌 포커스]
- 살인 누명에 구치소서 보낸 결혼식날 밤…“이제는 외국인 차별 없는 세상 만들어야죠” [법조 Z
- 깊은 상처 안고 돌아온 고국, 따뜻한 희망의 한끼[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