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집들, 논란의 동상들…기억의 이야기: 서도호 작가 인터뷰

2024. 8. 3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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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묶는 세계적 미술가 서도호
서도호 작가와 그의 움직이는 ‘공인들(1/6 스케일)’(2024). 받침대 위에 동상이 없고 대신 수많은 작은 남녀상이 받침대를 떠받치는 ‘기념비 뒤집기’의 대표작이다. 11월 3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하는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사진 아트선재센터]
“나는 달로 가지 않았어요. 더 멀리 갔습니다. - 시간은 두 장소 사이의 가장 먼 거리이니까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1944)에서 가출한 주인공이 오랜 세월 후 집을 기억하며 하는 대사다. 이 명대사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를 진행 중인 세계적인 미술가 서도호(62)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도 알맞을 것이다.

지금 런던에 거주하는 그는 어린 시절 살던 서울 성북동 한옥(부친인 고(故) 서세옥 화백이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과 미국 유학 시절에 지낸 아파트 등 그간 살아온 집들을 반투명 천을 사용, 실물 크기로 재현한 설치미술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서구 도시의 실제 건물들 틈이나 육교에 마치 그의 옛 한옥 집이 날아와서 박힌 듯한 모습을 연출해서 이주와 문화 충돌의 경험을 표현한 공공미술로도 유명한데, 이들의 축소 모형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서도호 '연결하는 집, 런던' 1/125 스케일 모형(2024)이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모습. [사진 아트선재센터]
서도호 '연결하는 집, 런던'이 실제로 런던 시내에 설치된 모습. 2019년 10월 촬영. [사진 문소영 기자]
서도호 '연결하는 집, 런던'이 실제로 런던 시내에 설치된 모습. 2019년 10월 촬영. [사진 문소영 기자]
서 작가의 작업은 ‘기억된 공간’이나 ‘미래의 공간’이기 때문에 시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천으로 재현된 집들이 반투명한 이유는 작가의 말대로 “집을 형상화한 게 아니라 집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조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해외 미술관 전시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이 많다고 한다. 그는 중앙SUNDAY와의 예전 인터뷰에서 “나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것인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다시 기억과 관련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것을 특히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이번 전시에 나온 필름 ‘로빈 후드 가든’이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로빈 후드 가든은 1970년대 런던 동부에 건설된 거대 콘크리트 아파트인데 유토피아적 취지와 달리 점점 슬럼화되다가 치열한 찬반 논란 속에 결국 철거와 재개발이 결정됐다. 그러자 런던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V&A)이 건물 일부를 통째로 잘라내 보존함과 동시에 서 작가에게 이곳에 관한 영상작품을 의뢰해서 ‘로빈 후드 가든’이 나온 것이다.

집단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질문 던져
서도호의 ‘로빈 후드 가든’(2018)이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상영되는 모습. [사진 문소영 기자]
서도호의 파노라마 영화 '로빈 후드 가든'이 2018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상영되는 모습. [사진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
서 작가의 필름은 아파트 한 동이 이미 절반쯤 해체된 상태에서 아직 온전한 나머지 한 동을 담았다. 카메라가 거대한 외벽, 복도, 아직 사람들이 사는 집들과 이미 떠난 빈 집들의 내부를 초고화질 영상으로 수직·수평으로 훑는다. 카메라의 이동이 느리고 정적이지만 빈 방에 에드워드 호퍼 그림처럼 드리워진 하얀 햇빛의 사각형은 빠르게 커졌다 줄어들고 창문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굴착기들은 뚝뚝 끊어지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래서 비디오 촬영이 아니라 타임랩스(저속촬영)로 연속해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연결한 영상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이 영상에 훨씬 더 긴 시간이 압축되었음을 관람객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중앙SUNDAY와 다시 만난 서 작가는 “동영상 촬영이었으면 30분에 찍을 분량이지만, 거기 살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기억이 축적된 공간을 그렇게 찍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팀에게 허락된 시간(거주자가 있는 집은 최대 8시간, 빈 집은 사흘)을 완전히 다 써서 타임랩스 사진을 찍었다”고 밝혔다.

말 없는 건축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답다는 평에 대해 작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는 않았고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찍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당시 재개발에 대한 찬반이 첨예한 상황에서 분위기는 살얼음판이고 또 촬영 때 무척 춥고 찌든 커리 냄새가 났고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옆 동을 허무는 공사 소음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찍힌 사진들에서는 그런 감각적 경험이 사라져버리고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더군요. 살아온 집을 천으로 재현하는 작업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완적인 작업으로 ‘러빙/러빙(Rubbing/loving) 프로젝트’(집 벽을 흰 종이로 덮은 후 문질러서 탁본을 뜬 작업) 같은 것도 하며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에 설치된 서도호의 ‘집 속의 집’(2019). 반투명 천으로 재현한 집 연작 중 하나다. 전택수 촬영. [사진 리만 머핀 갤러리]
집의 기억에 관한 서 작가의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지고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우수를 자극한다. 그런데 그는 개인의 기억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를 형성하는 집단의 기억을 다루며 ‘누구와 무엇을 선택해서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느냐’에 정치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도전할 수 있는지 질문하기도 한다. 바로 모뉴먼트(기념조형물)와 관련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 나온 ‘미국을 위한 기념비’ 1/16 모형을 보면 트럭 위에 광고판 같은 거대 거울을 부착해서 트럭이 달리는 길 위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울에 비쳐 거대 기념조형물처럼 보이게 한 작품이다.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특별히 고른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니 모뉴먼트의 모든 기존 문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서도호 '미국을 위한 기념비(1/16 스케일)'(2024)가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모습. [사진 아트선재센터]
또한 ‘역(逆)모뉴먼트’ 혹은 ‘반(反)모뉴먼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해외 책과 다큐멘터리에 회자되어온 서 작가의 ‘공인들’이 이번 전시에 1/6 사이즈의 움직이는 모형으로 나와있다. 움직이는 ‘공인들’이 공개된 것은 세계 최초다. 작가는 “1998년 뉴욕 퍼블릭 아트 펀드 전시에 처음 선보일 때부터 움직이는 조각으로 구상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루에 20㎝씩 움직여 전시 기간인 1년에 걸쳐 공원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하게 하는 구상이었다. 퍼블릭 아트 펀드도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으나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조각 작품은 관람객에게 훼손되는 경우가 많아 실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작가는 “조만간 1대1 사이즈의 움직이는 ‘공인들’이 해외 모처에 설치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동상과 기념비에 대한 논란이 거센 이때 모뉴먼트의 앞날을 묻자 그는 “모뉴먼트는 역사와 관련된 것인데, 역사가 (인물과 사건의 선택적 기억과 가치 평가라는 면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기준으로 잘못됐다고 다 지워버리면 역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해 4월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앞마당에 설치된 서도호 작품 ‘공인들’. 미술관 100주년을 기념해 5년 간 설치된다. 내셔널 몰(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까지 동서로 2㎞ 이상 뻗어 있는 기다란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은 미국 수도의 중심부에 눈에 띄게 배치되어 매년 내셔널 몰을 방문하는 2500만 명의 방문객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념조형물의 역할을 재고해 보려는 세계적인 움직임과 딱 들어맞는다”고 했다. 작가는 이것이 "모뉴먼트의 형식을 취한 안티 모뉴먼트'라고 설명했다. [사진 스미소니언 매거진]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 전시된 서도호 작품 '공인들'부분 확대 [연합뉴스]
2020년 ‘BLM(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국 시위자들이 과거 노예 상인이었던 인물의 동상을 물에 던져버린 사건을 언급하며 그는 말했다. “당시 논란의 동상들을 거리에서 치우고 뮤지엄에 넣자는 의견이 많았어요. 하지만 뮤지엄도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물을 선택적으로 보존하는 곳이니 정치적 관점이 개입하기 마련이고 이런 동상이 그 컬렉션이 되는 데는 논란이 생기겠죠. 차라리 동상을 없애고 받침대는 남겨서 흑역사를 지우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거기에 증강현실로 과거에 있었던 동상과 그 인물에 대한 정보가 뜨게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그는 “새로운 모뉴먼트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모뉴먼트 형식을 전복해서 그 문제점을 각성시키는 정도의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서도호 작가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 기자간담회에 앞서 관계자가 '향수병'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에 대한 작가의 깊고 유연하며 지적 유희가 깃든 사고는 최근작 ‘사천왕사를 위한 제안’으로 이어졌다.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비단으로 ‘사천왕사’ 절을 세우고 밀교 의식을 거행해 당나라군을 물리쳤다는 간략한 기록이 바탕이다. 아직 모형과 프로토타입으로만 존재하며 “언젠가 사천왕사 유적지에 일시적으로 세우고 싶다”는 게 작가의 소망이다. “반드시 분해되는 천으로 만들어 마지막에는 골조만 남게 하고 그 골조를 접어 치울 것”인데, 이는 역사에 절대적 해석이란 없으며 기억과 역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관점을 반영한다.
서도호 ‘사천왕사를 위한 제안’ 모형(2024)이 서울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 아트선재센터]
라크마의 신정왕후 병풍, 본래 의미 복원
그는 또 자신의 조부인 독립운동가 서장환 선생 관련한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에 상하이 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셨어요. 어릴 때 할아버님이 일제에 고문 받았던 흉터를 봤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당시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맡았던 분이 일제에 들키지 않고 할아버님 편지들을 보관하기 위해 방 벽을 그 편지들로 도배를 하고 그 위에 다시 종이를 덮었다고 합니다. 그 손자 되는 분이 그 편지들을 떼어 보관하다가 저희 아버님(서세옥 화백)께 전달하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생전에 그 복사본을 저한테 보여주시면서 '이걸 번역하는 게 이제 내가 할 일이다" 하셨는데, 그러다 돌아가셨어. 그래서 제가 그 편지 텍스트를 가지고 방을 만드는 설치작품을 구상하고 있어요.”

또한 라크마(LA 카운티 뮤지엄)의 2026년 새 건물에 들어갈 커미션 작업도 있다. 라크마에 소장된 신정왕후(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의 병풍 ‘무진진찬도병’과 관련된 작품이다. “서구 미술관의 컬렉션이나 그 분류 체계는 제국주의의 산물이잖아요. ‘중동관’ ‘극동관’처럼 유럽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분류하고 또 그 지역의 유물을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화이트 큐브(중립적 백색 공간)에 본래 관계 없던 유물과 함께 전시하잖아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본래 이 병풍이 있었을 경복궁 자경전(조대비를 위해 지어졌다)을 염두에 두고 이 병풍에 원래의 맥락을 찾아주는 설치작품을 할 생각입니다.”

이처럼 작가 서도호가 다루는 기억은 사적인 기억부터 공적인 기억에까지 걸쳐 있다. 그는 이것을 자유로운 사색과 추론, 즉 ‘스페큘레이션스’를 통해 확장시키고 작품으로 구현해 나가고 있다.

문소영 기자 moon.s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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