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석양을 그렸다… ‘상실의 시대’ 붓질한 윤중식

김인혜 미술사가 2024. 8. 3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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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대동강(大同江) 해 지는 풍경이 아름답긴 한가 보다. 평양 사람 최초로 서양화를 그린 화가 김관호는 해 질 무렵 대동강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려 데뷔했다. 도쿄미술학교를 최우등 졸업한 그는 1916년 ‘해 질 녘’으로 일본 최고 권위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일본인들을 제치고 ‘장원 급제’했다며 소설가 이광수가 흥분해 이 소식을 고국 신문에 알렸는데, 그 시절 차마 벌거벗은 여인 모습을 신문에 내보낼 수 없어서, 도판은 실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도쿄미술대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이 작품은 국내에도 몇 차례 전시됐는데, 실제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강변에 붉게 물든 하늘과 구름의 오묘한 색채를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김관호 외에도 평양을 방문한 많은 이가 대동강의 석양을 그렸다.

그러나 윤중식(1913~2012)만큼 대동강 석양을 주야장천 그린 화가가 또 있을까. 평양이 고향인 윤중식은 아버지 친구인 김관호의 인정을 받아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김관호가 어린 윤중식의 실력을 보고는 화가로 키워도 되겠다고 그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윤중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평안북도 선천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전쟁 중 월남했다. 1·4 후퇴 대열에 끼어 폭격을 피하고 가족과의 생이별을 거쳐 부산에 안착한 후, 휴전 이후에는 서울 성북동에 뿌리를 내렸다. 99세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그는 성북동 화실에서 대동강의 석양을 평생 그렸다. 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토록 한 예술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지, 대동강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대동강 변의 추억

화가 윤중식의 2004년 작 ‘석양’.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은 다재다능했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운동도 잘했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수영 선수로 대동강 종단 수영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다. 능라도에서 대동교까지 3100m 거리를 수영하는 대회. 조선 청년들이 강인하게 자라기를 바랐던 선각자들은 ‘근대 스포츠’를 의식적으로 권장했다. 윤중식은 1932년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수상경기대회 자유형 100m 1등, 500m 2등을 수상한 기록이 있다.

어린 시절 그의 생활 터전은 사시사철 대동강 변이었다. “내가 학생 시절, 봄가을로 즐겨 그림을 그리고 여름에는 수영을 하며 또 겨울에 납쩌리(어명)를 잡던 곳이 바로 연광정이다… 여기 오르면 모란봉, 을밀대, 현무문, 부벽루, 능라도, 대동교가 일모하여 들어온다… 덕암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타고 까만 돛을 단 석탄배가 꿈을 꾸는 듯 떠내려와 능라도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 배를 나는 여간 즐겨 그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윤중식은 이때의 순수와 낭만을 지키는 일에 일평생을 바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72년 환갑이 다 된 나이에도 이렇게 썼다. “지금도 내 화제(畫題)에 주(主)가 돼 있는 강, 고깃배, 먼 산, 뭉게구름, 새… 이 모든 것은 대동강변에서 스케치하던 시절의 연속이다. 고요하고 맑은 강과 섬, 그리고 주홍으로 물들어 한없이 아름다운 구름이 역시 그때 감수된 것들이다.”

◇참혹한 전쟁 체험

석양이 물든 강 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그린 ‘무제’.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은 1913년 평양 박구리(현 중구 경림동)에서 미곡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9남매 중 여섯째. 고개마다 교회가 있었다는 평양에서 일찍 기독교에 입문했던 이 집안은, 자녀를 모두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윤중식의 형은 동경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었고, 큰누나는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예일대 법대를 나온 김성락과 결혼했다. 김성락은 윤중식과 같은 숭실중 졸업생으로, 김일성의 아버지와 주일학교 친구 사이. 그 인연으로 김성락은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두 번이나 평양을 방문했다. 어쨌든 윤중식의 집안은 부자였고 대단한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해방 후 탄압의 대상이었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밀려 내려올 때, 그 피란 행렬에 윤중식의 가족도 끼어 있었다. 아내와 딸 둘, 아들 하나를 데리고 달구지에 짐을 싣고 길을 나선 이 가족은 해주를 지날 무렵 공습을 당했다. 순식간에 아내와 큰딸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윤중식은 네 살 난 아들과 젖먹이 딸을 양손에 한 명씩 잡고 안고 남하했다.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젖먹이 딸은 굶어 죽었다. 아들 하나만은 퉁퉁 부은 얼굴로 죽을 얻어먹고 간신히 살아났다.

부산에 도착해 죽을 얻어먹고 있는 아들을 그린 ‘전쟁 드로잉’(1951).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은 이 모든 과정을 28점의 드로잉으로 그렸다. 처절한 개인사지만,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피란민의 처참한 모습도 스케치에 담겼다. 언젠가는 이 스케치를 커다란 그림으로 옮겨 그리겠다고 다짐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차마 다시 꺼내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그림들은 그대로 보존되다가 화가 사후 2020년 처음 공개됐다. 전쟁 당시 네 살이었다던 그 아들은, 최근 아버지의 스케치에 글을 붙여 ‘할아버지의 양손’이라는 책을 펴냈다.

◇애타는 그리움이 붉은 노을로

어릴 적 정미소를 한 고향집에서 자주 본 비둘기는 그림 ‘가족’으로 탄생했다. 옹기종기 모인 비둘기 가족이 평화로워 보인다. /성북구립미술관

평양에서는 알아주는 부잣집이었지만, 월남한 그는 거지 신세였다. 그의 부모와 형제 둘은 북에 남았다. 피란 중 헤어진 아내와 큰딸은 그 후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딸이 혹시 고아원에 맡겨지진 않았는지, 발톱이 빠지도록 고아원을 찾아다닌 세월이 길었다. 1980년대 KBS 이산가족 찾기 운동 당시에는 혹시 모를 희망을 안고 사연을 접수시키기도 했다. 그 시절 수많은 이산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타들어 가는 화가의 심정, 붉은 노을로 화(化)해 화폭을 물들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윤중식의 작품은 겹겹이 첩첩이 붉고 노란 수평선으로 이뤄져 있다. 이 선들은 시간적으로 아득하고, 공간적으로도 아주 먼 어떤 세계를 암시한다. 그 사이에는 강이 놓여 있어 아무리 가려 해도 건너갈 수 없다. 새들만이 이곳을 자유로이 넘나들 뿐. 윤중식이 특히 새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도, 그런 자유가 부러워서일 것이다. “내 일생이란 게 그저 고향 가고 싶은 생각과 헤어진 딸을 보고 싶은 생각으로….” 그것이 화가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생전의 화가 윤중식.

이런 작품은 구상이나 추상 같은 미술사적 양식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시대가 변하고 세계의 미술 양식이 어떻게 흘러간들, 그의 작품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윤중식의 작품을 직접 보면, 석양의 황홀한 색감에 왠지 모를 울컥함이 밀려온다. 그의 그림은 가슴으로 읽힌다. 그림 앞을 계속 서성이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린 건 대동강의 석양이 아니라 그리움 자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윤중식의 서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대에는 적지 않았다. 숭실중 후배였던 언론인 장준하도 윤중식의 팬이었다. 잡지 ‘사상계’에 윤중식의 드로잉이 특히 많이 들어갔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1970~80년대 미술 시장에서도 호응이 좋았다. 그림값도 높아서 한때 생존 작가 작품 가격 3위에 올랐다. ‘그리움’은 시대 정서였다. 그림이 팔려 생계가 해결되자, 윤중식은 어려웠던 피란 시절을 생각하며 매년 동네 고아원과 양로원에 생필품을 보냈다. 수십 년 계속된 일이었지만, 절대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했다.

◇윤중식의 유산

1980년 작 ‘평화’. 강과 고깃배, 먼 산과 새 등 화가의 주된 소재가 모두 등장한다. 그는 해 지는 풍경뿐 아니라 아침의 찬란한 순간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윤중식은 창덕여고 교사 생활을 10년 했고, 여러 대학 강사를 하긴 했지만, 평생 대부분 성북동 화실에 들어앉아 그림만 그렸다. 1959년 재혼해 두 딸을 얻고 손주를 볼 때까지, 그는 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성북동의 마당과 화실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 소나무처럼 자신도 성북동이라는 새 터전에 깊이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자녀를 교육할 때까지는 그림을 팔았지만, 이후에는 작품을 잘 내놓지 않았다. 두 번 도둑을 맞아 시장에 돌아다니는 작품들도 있긴 하지만, 그는 대체로 작품을 몹시 아꼈다. 갤러리에 내놓았던 작품도 불쑥 찾아와서는 다시 되가져가 버리곤 해 화랑 주인을 힘들게 했다. 그러는 동안 윤중식의 이름이 차차 대중에게 잊혔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아껴서 남에게 잘 보여주지도 않던 그림들을, 작가 사후 아들은 공공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림을 흩어지게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윤중식의 대표작 20점이 기증돼 현재 과천관에서 열리는 ‘1960~70년대 구상회화’ 전시에 일부 걸려 있다. 작품 원본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화가가 50년 넘게 정착했던 제2의 고향 성북동의 성북구립미술관에는 무려 500점의 작품을 무상 기증했다. 이 중 일부가 2022년 작가의 10주기 회고전에 소개됐다.

북에서 내려와 남한에 정착한 실향민 예술가들이 작품을 공공미술관에 기증한 사례는 유독 많다. 윤중식과 가까웠던 최영림, 홍종명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대거 기증했고 ‘물방울 화가’ 김창열도 제주도에 대표작을 남겼다. 이들에게 작품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끝내 고향 땅에 묻히지 못했던 예술가들.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담긴 작품을 영구 보존하는 미술관을 일종의 마우솔레움(영묘·靈廟)이라 믿으며 이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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