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녹는데 플라스틱 쓰는 인간들...눈물 난다” 어린이 덮친 기후 우울증

정시행 기자 2024. 8. 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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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기후헌법소원 최종 선고에 대한 공동회견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31년 이후 온실가스 감축량을 설정하지 않은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계획은 헌법에 어긋난다"며, 전원일치로 탄소중립기본법 8조1항에 대해 헌벌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박상훈 기자

“누군가 플라스틱 일회용품 버리는 모습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공부하다가도 기후위기에 관한 수업 내용과 뉴스가 떠올라 눈물이 흐른다. 어른들은 걱정하는 시늉만 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중학교 1학년 박모양)

“인류의 탄소 배출이 계속되면 2050년쯤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2~3도나 오른다고 한다. 이미 내 존재가 민폐처럼 느껴지는데, 기후 지옥에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해서라도 출산할 생각이 없다.”(26세 대학생 송모씨)

MZ세대 청년과 청소년·어린이 사이에서 ‘기후 우울증’이 퍼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폭염과 폭우, 혹한, 산불, 가뭄과 같은 이상기후가 빈발하고 식생 변화와 동물 멸종, 식량 가격 급등이 잇따르면서다.

2022년 서울 시청역 인근 건물 옥상 전광판에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아 터전을 잃고 있는 대형 북극곰을 형상화한 3D 영상이 게시된 모습. 기후위기를 접하는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민감한 젊은층과 어린이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조선일보DB

기후 우울증은 기후 변화가 자신과 가족을 포함, 국가와 인류에 위기가 닥쳤다는 불안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날씨가 안 좋아 기분이 나쁜 것과는 다르다. 기후 변화 걱정으로 학교와 직장 등 일상생활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의욕을 잃는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비슷한 증상을 보여 약물 치료를 요하기도 한다.

기후 우울증은 심리학과 정신건강의학계에서 공인된 병증이다. 10여 년 전 서구에서 기후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농부·어부와 과학자, 환경운동가, 그리고 감수성 예민한 10~20대와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심리학회는 2017년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을 우울 장애의 일종으로 정의했다.

2021년 16~25세 미 청년 1만명 조사에서 84%가 “기후 변화를 걱정한다”, 60%는 “극도로 걱정한다”고 답했다. 배를 곯았을지언정 기후를 걱정해본 적 없는 기성세대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좌절이 더 커진다.

2020년 가을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젊은 유권자들이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데 파리기후협약에서 왜 탈퇴했느냐”고 묻자, 비웃듯 “조금 있으면 (겨울이 와서) 추워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분노를 일으켰다.

지난해 2023년 6월 미국 뉴욕 맨해튼이 캐나다에서 발생한 산불로 남하한 연기와 안개로 뒤덮였다. 당시 산불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캐나다 산림에서 자연발화해 미 동북부까지 집어삼켰으며, 세계 수도 뉴욕에 종말이 온 듯한 이미지로 충격을 안겼다. /로이터 연합뉴스

기후 우울증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에 본격 상륙했다. 젊은이들이 전례 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코로나는 인류의 환경 파괴로 야생동물 서식지가 줄어 창궐한 바이러스다. 앞으로 이런 팬데믹이 또 올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다. 비슷한 시기 각국서 동물 집단 폐사, 폭염·가뭄 등 기후 재난이 본격화됐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어릴 때 기후위기 걱정으로 두 달 만에 체중이 10kg 빠졌다고 한다. 남 일이 아니다. 요즘 국내에도 ‘툰베리’들이 상당히 늘고 있다는 게 정신과 의사들의 전언.

경기도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이모군은 “인터넷에서 ‘2040년 빙하가 다 녹고 해류가 멈춘다’ ’식량난으로 인류는 멸망하고, 살아남아도 불지옥’ 같은 댓글을 보면 숨이 가빠진다”며 “스무 살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의 기후위기시계.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섭씨 1.5도 오를 때까지 5년도 채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다. 기후변화의 임계점으로 일컬어지는 ‘1.5도 상승’으로 폭우·폭염과 가뭄 등 이상기후가 심화되고 생태계 절반이 사라질 전망이다. /이덕훈 기자

21세 대학생 김모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빙하가 녹고 새끼 북극곰이 떼로 죽고, 꿀벌이 사라진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과 불안해하는 게 일상이 됐다”며 “앞으론 극한 날씨와 고물가를 극소수 부유층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울하다”고 했다.

“선풍기는커녕 부채질만 하고, 샤워도 5분 내로 하고, 고기를 거부했더니 가족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사람들이 에어컨 펑펑 쓰고 화석연료 쓰는 자동차로 도로가 덮인 것을 보면 가슴이 꽉 막힌다”는 고등학생들도 있다.

결혼과 출산 기피도 심화시킨다. 영국에선 2018년부터 기후 우울증에 걸린 청년층 사이에 출산 파업(birth strike)이 퍼졌고, 미 모건스탠리는 “기후 변화 공포로 세계 출산율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김의균

서울의 40세 주부 김은성씨는 “내 아들은 앞으로 사계절을 경험하거나 자식을 낳는 경험도 못 할 것 같아 미안하다”며 “둘째 낳기는 포기했다”고 했다. “일회용 기저귀 쓸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 “음식쓰레기 안 만들려고 애쓰다 노이로제 걸릴 것 같다” “탄소 배출이 많은 에어컨을 안 틀고 버티다 아기가 아파졌다”는 젊은 엄마들도 있다.

이런 이들을 돕기 위해선 기후위기 걱정을 ‘쓸데없다’고 치부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 감정을 이해해주고, 쓰레기를 함께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는 등 작은 활동을 함께 해나가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지구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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